[전영희 기자가 간다] 삑삑! 포켓도 외면하는 ‘삑’ 소리의 제왕

입력 2009-11-25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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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뼘 이라니까!’ 큐 끝부터 브리지까지의 간격은 한 뼘 남짓이 적당하다. 고교 시절, 당구장 아르바이트 형에게 ‘게임 비’ 라는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배웠던 폼이 결국 ‘불량’으로 판명 나는 순간. 해 없는 방정식 같은 전영희 기자의 폼에 차유람(왼쪽)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고양 |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B급문화 벗고 ‘귀족 스포츠’ 유턴
POCKETBALL


자욱한 담배연기. 껄렁껄렁한 동네 형들의 놀이터. 당구장의 예전 이미지는 이런 것들이었다. 1994년, 당구장이 청소년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선생님들은 “당구장은 안 된다”는 말을 종례시간의 주 레퍼토리로 삼았고, 교복 재킷에 초크 자국이라도 묻혀 오는 날에는 아버지에게 혼쭐이 나야 했다. 하지만 당구는 본디 귀족의 스포츠였다. 현대적인 당구가 시작된 곳은 16세기 유럽의 왕실. 이 땅에서 당구를 처음 즐긴 인물 역시 조선의 마지막 임금(순종)이었다. 자유당 시절, 깡패들이 당구사업에 손을 대면서부터 이미지가 나빠졌을 뿐.

최근 당구장은 B급 문화의 칙칙함을 벗고, 다시 예전의 지위를 찾고 있다. 특히, 포켓볼을 즐기는 여성인구는 증가추세. 차유람(22) 등 여성당구스타들의 공이 컸다. 셰익스피어가 쓴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를 보면,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당구장으로 가실까요?”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만약, 클레오파트라가 큐를 잡는다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경기도 고양에서 대표팀 훈련 중인 차유람에게 포켓볼을 배워보기로 했다.


○당구장에서 자장면은 NO! 경기 전에는 ‘초식 남’이 되어야…

차유람은 10월29일부터 이달 7일까지 베트남에서 열린 아시아인도어게임 여자나인볼(9볼)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회전에서 세계랭킹 1위의 대만선수를 꺾는 등 이제 실력 면에서도 세계정상급에 다가서고 있다. 19일부터 22일까지 중국 신양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도 9강의 쾌거를 달성했다.

“제 이름이 유람이라서 그런지, 세계를 떠돌아요.” 2008년 미 여자프로당구협회(WPBA) 정회원 자격을 획득한 차유람은 2009년의 절반 이상을 미국에서 보냈다. 주 훈련 캠프지인 미국플로리다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체력보강. 러닝과 수영으로 지구력을 키웠다. 대표팀 이장수(52) 감독은 “하루 최대3경기, 총 5시간 이상 경기를 치르기 위해 강한 체력은 필수”라고 했다.

근력운동으로 훈련시작. 튜브를 당겨 팔 근육을 키운다. “느낌이 와요?” 일그러진 얼굴이 무언(無言)의 대답을 하고 있었다. 덤벨운동까지 하고나니, 배가 고프다. 순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자장면이 떠올랐다. 바로, 당구장에서 시켜 먹는 자장면. 근처 중식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역시 당구장 자장면이 최고!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자장면을 시켰다가 차유람에게 혼쭐. 당구장 에티켓 하나, ‘자장면은 중국집에 가서 드세요!’ 고양 |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여기서 드시면 안돼요.” 당구장 에티켓부터 배워야 한다며 차유람과 이장수 감독에게 연거푸 혼이 났다. 그래도 한 입은 우겨넣고…. 다시 당구대로 향했다. 에티켓을 차치하고서라도, 느끼한 음식섭취는 경기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유람은 “중요한 경기 전에는 육식을 자제하고, 생선과 야채 위주로 식단을 짠다”고 했다. 머리를 맑게 하기 위함이다. 더부룩한 배. 큐를 잡기도 전에 졸음이 밀려왔다.


○공의 회전을 줄여라

“일단 한 번 쳐보세요.” 고등학교 시절, ‘게임 비’라는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만든 폼을 선보였다. 돌아온 차유람의 답변. “어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원 포인트 레슨이 시작됐다. 큐와 고개 사이의 간격은 주먹 하나. 큐의 끝부터 브리지까지는 한 뼘보다 약간 길게. 브리지의 높이는 사구(四球)나 스리쿠션 때보다는 다소 낮아야 한다. 사구는 공의 지름이 65.5mm, 캐롬(스리쿠션)은 61.5mm인데 반해, 포켓은 57.25mm로 작기 때문.

“포켓은 그렇게 끊어서 치면 안돼요.” 이번에는 이장수 감독의 레슨이 시작됐다. 공의 회전이 많아야 하는 캐롬에 비해, 포켓은 회전을 최소화시키는 게 관건이다. 수구의 회전이 많으면 목적 구에 맞는 순간, 미세한 오차에도 분리 각이 커지기 때문이다. 포켓을 외면할 가능성은 더 커진다. 따라서 포켓에서는 회전을 많이 주는 스냅 샷보다는 폴로우를 중시하는 스윙 샷이 주로 쓰인다.


○마음 속 네비게이션으로 길 찾기

포켓볼 훈련의 첫 걸음은 이미지 볼. 1단계. 목적구와 포켓사이에 가상의 직선을 그려 그 직선의 연장선상 위에 목적구와 수구를 붙인다. 2단계. 이제 수구가 어느 위치에 있든, 1단계에서 수구와 목적 구를 접붙이기한 곳으로 수구를 보내면 목적 구는 포켓을 향한다.

“참 쉽죠?” 정말 쉬울 줄 알았다. 하지만, 계산과는 달리 목적 구는 포켓을 한 없이 외면했다. 다급한 마음에 큐로 목적구와 포켓 사이를 연거푸 찍자, 이장수 감독이 “마음속으로 길을 그려야 실력이 는다”고 조언했다. 감각은 시스템을 이기는 법. 네비게이션만 찍고 운전하다보면, 결국 자기 스스로 길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음 훈련은 점프 샷. 목적 구를 가리는 공이 있을 때, 그 공을 넘겨 목적 구를 맞추는 기술. “저 이거 해봤어요. 끌어 치기하다가 실수하면 그렇게 공이 점프 하던데요.” 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점프를 시켜야 한다. 점프 샷을 할 때 쓰는 큐는 메인 큐보다 짧다. 45°가량 큐를 세워서 쳐야 하기 때문. 3번째 만에 성공. 수구를 띄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공은 아예 당구 대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한 큐에 끝…3분 만에 ‘Run out game.’

포켓볼은 8볼, 9볼, 10볼로 나뉜다. 차유람의 주 종목은 9볼. 1번부터 8번 공을 순서대로 넣은 후, 9번 공을 넣는 선수가 최종승자. 1∼8번 공을 상대가 넣는다고 해도, 9번 공을 넣는 선수가 이기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의외성이 크다. 8볼은 양 선수가 솔리드 공(1∼7번)과 스트라이프(9∼15번) 공을 택일 해 넣은 뒤, 8번 공을 먼저 넣으면 승자가 된다. 9볼과는 달리 사전에 자신이 지정한 포켓에 공을 넣어야 하기 때문에 운이 통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다. 차유람과의 8볼 실전대결. “먼저 치세요. 몸을 힘껏 던져서! 그래야 하나는 들어가거든요.” 차유람이 초구를 치는 브레이크 큐를 건넸다. 브레이크 큐는 수구에 파워를 실어야 하기 때문에 튼튼하고 다소 무겁게 만든다. ‘팍’ 파열음과 함께 수구까지 16개의 공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켓과는 척력이 작용하는 듯 했다.

차유람의 차례. 한 개씩 당구대에서 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7개의 공을 단번에 없앤 차유람은 마지막으로 8번 공을 노려봤다. “이거 너무 한 거 아닌가요? 난 아마추어인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기 종료. 단 3분의 시간이 걸렸다. 한 큐에 끝내는 소위 ‘Run out game’.

“한 경기 더해요!” 흥분은 당구의 적. 다음 판에는 초구부터 ‘삑’ 소리를 내며 큐와 수구가 빗맞았다. 차유람은 “나도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를 읽으며 내 자아와 대화하고, 평정심을 찾곤 했다”며 미소를 띠었다.

포켓볼의 기술은 결국, 마음을 다스리는 연금술이기도 했다.

고양|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 |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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