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들의 땀과 열정은 ‘피’라는 것을
《‘단 하루 만이라도 선수들과 똑같이 땀을 흘려보고, 그들의 고충을 생생하게 전해보자.’이것이 ‘기자가 간다’가 첫 발을 내디딘 취지였다. 이후 복싱(2008년3월26일)부터 바이애슬론(2010년1월19일)까지, 총 50회 이상 스포츠현장을 누볐다. 때로는 뒤처져 길을 잃기도 하고 목을 삐끗해 2주간 한의원에 다니기도 했지만, 체육인들의 순수한 열정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2년 가까이 달려온 ‘기자가 간다’ 중 기억에 남는 5개의 사연과 뒷얘기들을 정리해 봤다.》
“사람살려∼” 레슬링대표팀은 복싱대표팀과 함께 불암산 종주의 강자로 꼽힌다. 반환점에서 기진맥진한 기자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2004아테네올림픽금메달리스트 정지현(왼쪽) 등 레슬링대표팀(아래). 길 잃은 기자에게 나침반이 돼 준 것은 산책을 나온 서울시민들이었다.
1. 저도 좀 데리고 가요!
불암산 종주 중 길 잃은 사연(2008년4월9일)
태릉선수촌을 경험한 선수들이라면 모두 오금을 저리는 불암산 종주. 태릉선수촌을 출발해 불암산을 돌아오는 8km 코스다. 산책한다는 기분으로 다녀오면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전력으로 달리는 선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 상위권을 휩쓰는 복싱대표팀의 경우, 자기기록을 깨지 못하면 주말 외박을 금하던 시절도 있었다.
예상대로 쉽지 않은 도전. 선수들은 이미 앞질러 간지 오래였다. 따가운 봄 햇살에 땀범벅이 돼 ‘눈물고개’를 넘어서자, 선수들의 박수소리가 들렸다. 잠시 휴식 후 하산. 다리는 풀리고 점점 더 벌어지는 선수들과의 격차. 아뿔싸! 길을 잃었다. 코스를 잡아주기 위해 주요 길목에 서 있던 지도자들이 선수들과 함께 철수해 버린 것. 사진기자와 함께 태릉사격장의 총 소리를 따라 내려와 보니, 노원구 공릉동 원자력병원. 택시를 타고서 겨우 태릉에 들어갔다. 당시 복싱대표팀 사령탑이던 천인호(51) 감독은 “실족이라도 한 줄 알았다. 지금 경찰에 신고하려던 참”이라며 뜨겁게 기자들을 안아주었다.
65kg 번쩍 “내가 해냈다” 역도는 힘뿐만 아니라, 무릎의 동작과 좌우 밸런스 등 기술이 중요하다. 2시간의 특별 과외 끝에 65kg을 들어올리고, 포효하는 모습.
2. 이배영투혼에 눈물을 흘린 이유
역도대표팀 훈련(2008년7월7일)
역도를 보면, 항상 궁금한 게 있었다. 굵고 짧은 하체. ‘과연, 저런 체형의 선수들이 역도를 시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역도를 하다보면 저런 체형이 되는 것일까.’ 1992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전병관(41) 국가대표상비군 감독이 그 해답을 줬다. “우린 어릴 때부터 이랬어요.”
“딱 보니 역도체형”이라는 말에 혹해서 태릉으로 향했다. 기본자세를 익히는 것부터 시작해 중량훈련까지. 고작 65kg을 몇 번 들고도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참고로 장미란(27·고양시청)의 용상기록은 187kg. 옆에 있던 이배영(31)이 “고작 그걸로 힘드냐?”고 물었다. 다음 이야기가 압권이었다. “난 이렇게 십 수 년을 했어요. 그런데 (올림픽에서) 성적이 잘 안나오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한 달 뒤, 2008베이징올림픽. 이배영은 쾌조의 컨디션으로 인상을 2위로 마쳤지만, 불의의 장딴지 근육경련으로 결국 용상을 모두 실패했다. 쓰러지면서도 바벨을 끝까지 놓치지 않던 그의 모습을 보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바로 한 달 전, 그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이배영은 이후에도 종종 이런 말을 한다. “고생 좀 해보니, 우리 마음 좀 알겠어요?”
김경문 “누구냐 넌…” 기마자세 후, 토스배팅. 손바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두산의 마무리 훈련은 계속됐다. 강 훈련 동참에 흐뭇한 미소를 보내는 두산 베어스 김경문 감독(뒤).
3. 배트에 지문 묻어나야 3할 타자
두산 마무리 훈련(2008년12월3일)
처음에는 이종욱(30)에게 토스볼 한 상자(약 150개)를 던져주며 실컷 보조만 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김광림(49·현 두산 2군감독) 당시 두산 타격 코치가 불러 세웠다. “자, 기마자세!”
이어지는 토스배팅. 김 코치가 쉴 새 없이 던지는 공에 기운은 점점 빠져나갔다. 30개, 40개, 50개…. 하지만 그칠 줄 모르는 토스볼 세례. ‘도저히 못하겠다고 쓰러질까? 아, 그럼 창피하겠지?’ 별 생각이 다 들다가 100개쯤을 넘어서니 무념무상의 상태다. 도리어 몸에 힘이 빠지니, 배트에 공이 잘 맞는 느낌까지. 기진맥진 한 상자를 치고 나서야 김 코치는 장갑을 벗을 시간을 주었다. 왼 손바닥의 피부는 짓이겨져 핏물을 게워내고 있었다.
하지만 고통보다는 뿌듯한 감정이 앞섰다. 미안한 표정 하나 없던 김 코치는 마침 지나가던 김현수(22)를 불러 세웠다. “(김)현수는 스프링캠프 때 이것보다 더 했어.” 김현수의 손바닥에는 작은 혹 같은 굳은살 들이 훈장처럼 빛나고 있었다. “방망이에 지문이 옮겨 갈 때까지 훈련해야 3할 타자가 된다”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전영희 장하다” 부산 KT 전창진 감독(왼쪽)도 놀랐다. 함백산의 가파른 능선을 1시간 만에 주파한 기자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됐다.
4. 준비된 돌풍, 프로농구 부산 KT
부산KT 태백전지훈련(2009년8월12일)
2009∼2010 KCC프로농구.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산 KT의 반란은 사실 2009년의 여름부터 예비 돼 있었다. KT의 태백전지훈련. 전창진(47) 감독은 본격적인 전술훈련을 앞두고,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지시했다. 그 백미는 함백산 크로스컨트리. 해발 1330m의 태백선수촌까지 총 6.4km의 오르막을 전력으로 질주하는 코스다.
“절대로 차를 타지 않겠다”고 박태양(24)과 굳은 약속을 하고, 출발. 200m만에 처지기 시작해 당시 무릎재활 중이던 송영진(32)에게도 밀렸다. 20분 이후부터는 후미 선수의 뒤통수조차 보이지 않는 고독한 레이스. 한여름의 열기가 아스팔트 위로 올라왔다. ‘걷다. 달리다’를 반복하다보니 어렴풋이 보이는 태백선수촌.
“중간에 포기할 줄 알았는데 대단하다”는 전 감독의 칭찬 속에 스톱워치를 바라봤다. 1시간20초. KT 선수단의 마지막 선수와는 정확히 5분 차이였다. “땀흘린 만큼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웃던 KT 선수들. 반년 만에 그 말은 현실이 되고 있다.
산산조각난 ‘철인의 꿈’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가 철인의 꿈을 조각내 버렸다. 물개처럼 미끈한 스윔 수트를 입고도 하마처럼 퍼져버린 기자. 하지만 20km의 마라톤을 끝낸 뒤 맛본 메달은 달콤했다. 스포츠동아DB
5.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스포츠
2009하이원 국제트라이애슬론 (2009년6월17일)
수 십 개의 종목을 체험하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비슷하게 따라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트라이애슬론 만큼은 그 첫 관문인 바다수영부터 불가능했다. 삼킬 듯이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거센 파도. 초보자에게 동해바다를 뚫고 왕복 3km를 헤엄치라고 말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으란 말과 별반 차이가 없다. 물 속에 뛰어들었다가 누군가의 팔꿈치에 몇 대를 맞고, 꼬르륵. 100m도 못가 부표를 잡고 돌아오던 중 들었던 진행자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첫 번째 탈락자입니다. 50여m 지점에서 돌아오네요.” 굽이치는 강원도의 산길을 달려야 했던 사이클(80km)과 마라톤(20km)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트라이애슬론은 대회 성격에 따라 코스가 나뉘는데 철인(Ironman) 칭호는 킹(king)코스(수영3.8km-사이클180.2km-마라톤 42.195km)를 17시간 이내에 들어온 선수에게만 주어진다. “과연 트라이애슬론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철인’ 이라는 말의 무게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겠느냐?”라고 묻던 한 참가자.
홈런과 덩크슛, 퍼펙트 텐(양궁)과 업어치기(유도)…. 우리는 가시적인 성과물들을 통해 짜릿함을 느낀다. 하지만 스포츠가 그것뿐이라면, 컴퓨터 게임과 다를 바가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이야기. 땀이 빚어내는 과정의 온기(溫氣)는 계속 퍼져나갈 것이다. <끝>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