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열 감독. 스포츠동아DB
박철우(36·한국전력)는 18일 안산 상록수체육관에서 열린 ‘도드람 2020~2021 V리그’ 남자부 5라운드 OK금융그룹과 원정경기 직후 이상열 KB손해보험 감독(56)을 향해 작심발언을 했다. 박철우는 12년 전 국가대표팀에서 당시 이상열 코치에게 폭행을 당한 피해자다. 17일 이 감독이 “난 (폭력) 경험자라 선수들에게 더 잘해주려고 노력 중이다. (중략) 어떤 일이든 대가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게 발단이었다. 박철우는 “그 기사를 보고 하루 종일 손이 떨렸다”며 “몇몇은 기절하고 몇몇은 고막이 나갔다. 그들이 내 동기고 친구다. 그게 과연 한 번의 실수인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사랑의 매도 어느 정도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감독은 “박철우와 소주 한 잔 하면서 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박철우는 이 감독과 코트 위에서 잠시 마주치는 것도 불편하다고 했다. 오히려 “사과 안 하셔도 된다. 보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박철우에게는 이 감독과 만남 자체가 2차 가해로 다가올 것이다.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20일 KB손해보험은 “이 감독이 잔여시즌 경기 지휘를 자진 포기했다”고 밝혔다. 21일 OK금융그룹전을 포함해 6경기가 남은 시점에서다. KB손해보험은 다음 시즌 이 감독의 거취는 물론 자진 포기한 올 시즌 남은 기간의 급여 지급 등에 대해선 논의 중이라는 입장을 덧붙였다.
이 감독에 앞서 학교폭력 전력이 드러난 송명근(28·OK금융그룹)도 잔여시즌을 ‘자진’ 포기했다. 송명근의 경우 5라운드 막바지, 이 감독은 6라운드만을 남겨둔 시점에서였다. 징계 수위 자체도 도마에 오르고 있지만, 이를 떠나 왜 가해자가 스스로의 징계를 결정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일고 있다.
물론 대한배구협회나 한국배구연맹(KOVO)에 이런 폭력 사태에 대한 매뉴얼은 없다. 초유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흥국생명은 이재영-다영 쌍둥이에게 무기한 출장정지 징계를 내렸다. “모든 일이 해결돼야 복귀 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구단의 명예를 실추시킨 만큼 품위손상 징계를 선제적으로 내린 이 같은 사례는 프로야구를 포함한 타 종목에도 여럿 있다.
박철우는 “이렇게 얘기하면서 분명히 (내게) 안 좋은 이미지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다. “이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면돌파하는 게 맞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자는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인데, 가해자는 과연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 것일까.
최익래 기자 ing1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