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인천 송도 잭 니클라우스 GCK 어반·링크스 코스(파72)에서 열린 제네시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안병훈이 우승 트로피와 함께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출처 ㅣKPGA 홈페이지
데뷔하자마자 PGA투어 3승을 달성한 김주형은 타이거 우즈, 로리 매킬로이와 조던 스피스를 연상시켰다. 그는 올해는 승수를 추가하지 못하고 있다. PGA투어 시그니처 대회인 트레블러스 챔피언십에서 연장전 끝에 스코티 셰플러에게 패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제네시스 챔피언십은 DP월드투어와 KPGA가 공동으로 주관했다. PGA투어 대회는 아니지만, 고국의 골프 팬 앞에서 첫 번째 유럽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면, 김주형의 경력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김주형은 같은 기간 일본에서 개최된 PGA투어 조조 챔피언십 대신에 제네시스 챔피언십을 선택했다. 후원사인 제네시스도 대회 흥행을 위해 김주형이 몹시 필요했을 것이다.
김주형은 골프 팬과 후원사 기대에 부응하며 선두를 달렸고, 안병훈이 우승 경쟁에 가세하면서 대회는 후끈 달아올랐다. 연장전에서 김주형은 티샷을 페어웨이에 안착시켰고, 유틸리티로 두 번째 샷을 쳤다. 경쾌한 타구음으로 판단했을 때, 공은 220야드를 정확히 날아서 그린 앞턱과 핀 사이의 작은 공간을 비집고 떨어질 것 같았고, 부드러운 그린은 멀리서 날아든 공을 받아서 이글 기회를 만들어 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공은 끝에서 그린을 살짝 벗어나 벙커 위에 거칠게 조성된 러프에 멈췄다. 불운이었다. 그의 불운은 물로 향하던 공이 워터해저드 바로 앞에서 멈춰 버린 안병훈의 행운과 묘한 대비를 이뤘다. 까다로운 위치에서 친 김주형의 세 번째 샷은 탑핑으로 그린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그 샷으로 김주형은 우승을 놓쳤다.
스토리를 살리는 마무리가 있고, 그렇지 않은 마무리가 있다. 안병훈에게 간절한 것은 PGA투어 첫 승이므로 DP월드투어 우승이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이미 9년 전에 유로피언투어를 우승했기 때문에 기껏해야 ‘마침내 보상받은 9년간의 기다림’ 정도가 기사의 제목이 될 것으로 보였다.
한중 핑퐁커플 안재형-자오즈민의 아들 안병훈(가운데)은 7세 때 아빠를 따라 골프연습장에 갔다가 골프채를 잡았다. 세계랭킹 31위로 리우올림픽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뛰게 된 안병훈은 부모가 이루지 못한 금메달의 꿈을 대신 이루겠다며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다. 사진제공 | CJ
그러나 ‘김주형이 실패해서 아쉽다’라는 생각이 ‘안병훈이 우승해서 기쁘다’는 것으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오즈민이 TV 화면에 나타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36년 전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재형과 자오즈민의 사랑은 당시에는 불가능에 가까웠던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러브스토리였다. 그 러브스토리의 결실이 안병훈이다. 자오즈민의 등장은 우리가 10년 전에 가지고 있었지만,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안병훈에 대한 기대를 상기시켰다.
제네시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안병훈이 할머니 송영희씨, 아버지 안재형, 어머니 자오즈민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 ㅣ KPGA
자오즈민 뒤에서 안병훈을 기다린 백발의 여인이 있었다. 안병훈을 키워주고 미국 생활을 지원한 할머니였다. 그녀의 몸은 안병훈 앞에서 유난히 자그마하게 보였다. 소박하고 짧은 헤어 스타일은 고급 골프 코스보다는 한적한 적은 시골 마을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할머니가 손자를 안아주자, 안병훈은 어머니와 포옹하면서 흘렸던 눈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고, 할머니는 ‘아이고 내 새끼’를 연발했다. 우리 할머니가 우리에게 해주던 그 말, 우리 어머니가 우리에게 해주었던 그 말, 우리가 다시 자식에게 전달하며 할머니와 어머니를 떠올리는 그 말이 골프 코스에 울리는 것이 좋았다.
그것은 스코티 셰플러가 우승하면서 아내와 키스를 나누고, 잰더 샤우플리가 어머니와 포옹하고, 로버트 매킨타이어가 임시 캐디를 맡았던 아버지를 부둥켜안은 장면과는 또 달랐다. ‘아이고 내 새끼’라는 손자를 향한 할머니의 말과 그 말에 눈물을 쏟아 내는 손자의 모습을 영국 방송으로 보면서 골프가 비로소 우리의 게임이 되었음을 느꼈다.
골프는 개인 운동이지만, 가족의 운동이다. 많은 골프선수가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따라서 온 연습장에서 골프를 접한다. 전문 코치의 가르침 이전에 아버지의 스윙을 모방하며 골프를 배운다. 무거운 골프 가방을 들고 골프 코스에 가기 위해서는 부모의 운전이 필요하다. 바쁜 부모를 대신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수고를 해 줄 때도 있다. 골프는 가족의 관여를 해야 하는 운동이다. 가족의 정신적 경험적 유산을 물려받고, 때로는 가족에게 물질적 희생을 요구한다. 그래서 골프대회 우승자가 가족과 나누는 포옹은 늘 특별하다. 안병훈과 할머니가 만들어 낸 골프의 특별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같은 시간 라커룸에서 발생한 일보다는 말이다.
윤영호 골프 칼럼니스트
윤영호 ㅣ 서울대 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증권·보험·자산운용사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했다. 2018년부터 런던에 살면서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옵션투자바이블’ ‘유라시아 골든 허브’ ‘그러니까 영국’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등이 있다. 런던골프클럽의 멤버이며, ‘주간조선’ 등에 골프 칼럼을 연재했다. 현재 골프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이다.
연제호 기자 sol@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