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 박미희 감독. 스포츠동아DB
평소 술을 입에도 대지 않은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은 소주를 무려 4잔이나 마셨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8월30일 홍천 KOVO 전국 유소년클럽대회 이벤트로 마련된 도로공사와의 시범경기 뒤 식사자리였다. 지난 시즌 여자부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을 다퉜던 두 팀은 KOVO(한국배구연맹)의 초청을 받아 4세트 연습경기를 했다. 유소년 꿈나무와 홍천 군민들 앞에서 소속 팀의 자존심을 걸고 겨뤘다. 두 팀 모두 최선을 다했다.
● 박미희 감독이 소주를 찾게 만들었던 홍천에서의 시범경기
두 번째는 외국인선수의 기량 차이였다. 도로공사 앳킨슨과 흥국생명 파스쿠치가 처음으로 팬들 앞에서 기량을 겨뤘다. 팀에 합류한 지 채 한달이 되지 않은 시점이라 속단하기는 어려웠지만 파스쿠치에 의문부호가 붙었다. 공격호흡이 맞지 않은 것은 그렇다 쳐도 파괴력의 차이가 컸다. 우람한 체구의 앳킨슨과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결국 승패와 직결됐다. 경기를 진행했던 심판들도 같은 판단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저 정도라면 남은 기간 동안 고민이 많겠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박미희 감독은 쓴 소주를 마시면서 고민했다. 이를 지켜본 프런트도 상황의 심각성을 공유했다.
● 홍천 시범경기 뒤 멘붕에 빠진 파스쿠치
결국 기량이 판단의 기준이었다. “아무리 선수가 향수병이 걸려도 배구를 잘하면 매주 이탈리아의 집으로 보내줄 수도 있지만 실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구단관계자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게 파스쿠치와는 이별을 결정했다. 흥국생명이 결별을 얘기하고 난 뒤부터 그의 표정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남자친구가 데리러 올 때까지 한국에서 쉬다가 돌아가겠다고 했다. 3달치 급여를 손에 쥔 그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짧게 비시즌의 V리그를 경험한 파스쿠치는 30일 이탈리아로 돌아간다.
● 돌고 돌아서 만난 프레스코와 흥국생명의 인연
이제 남은 것은 그 대타로 누구를 선택하느냐 여부였다. 영입이 가능한 선수들을 물색했다. 많이 거론되던 알레나는 배구를 그만둔다는 말이 들렸다. 듀크도 후보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가운데 루시아 프레스코가 떠올랐다. 에이전트를 통해 영입가능성을 타진했다. 프레스코는 흥국생명의 러브콜을 받아들였다. 마침 아르헨티나 대표선수로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에 출전 중이었다. 이영하 사무국장이 추석이 끝나자마자 일본으로 날아갔다. 대표팀에서의 2경기를 본 뒤 계약을 마무리했다. 속전속결이었다. 순천에서 KOVO컵을 준비 중이던 박미희 감독은 “외국무대 경험이 많은 것을 참고했다”고 말했다.
사실 프레스코는 돌고 돌아서 흥국생명에 온 선수였다. 토론토에서 벌어졌던 여자부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 때 흥국생명이 사전에 점찍었던 선수였다.
하지만 트라이아웃 장소에 하루 늦게 도착했다. 그 때문인지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박미희 감독은 실망하고 포기했다. 비록 우여곡절은 겪었지만 맺어질 인연은 맺어졌다. 이제 흥국생명과 프레스코가 인연의 좋은 마무리를 만들면 된다.
흥국생명은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취업비자 신청에 들어간다. 오사카에서 취업비자를 발급받는 3~4일 동안 프레스코는 현지에서 휴식을 취할 계획이다. 당초 프레스코는 아르헨티나에 돌아갔다가 다시 오겠다고 했지만 이 경우 지구를 거의 한 바퀴 돌아야 하고 시차적응으로 또 고생해야 한다. 손발을 맞춰볼 시간이 필요한 흥국생명은 프레스코가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했다. 그의 입국 예정은 10월 3~4일이다. 시즌 준비까지 딱 2주가 남은 흥국생명이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