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열 감독. 스포츠동아DB
지난 18일 한국전력 박철우가 “이번에는 (배구에서) 폭력이 뿌리 뽑혀야 한다”면서 강경하게 발언한 후폭풍이다. 17일 우리카드와 장충 원정경기 때 이 감독이 최근 V리그의 가장 큰 이슈인 학교폭력 폭로에 대해 “나쁜 일을 하면 언젠가는 대가를 치른다”면서 했던 ‘인과응보’ 발언이 방아쇠였다. 과거 폭력사건의 피해자였던 박철우가 분노의 심경을 담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라는 글을 올리고 18일 OK금융그룹과 안산 원정경기 뒤 공식 기자회견에 나선 지 이틀 만에 나온 결정이다.
지난 2009년 발생했던 당시 남자배구대표팀 코치였던 이 감독의 박철우 구타사건은 12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되살아나 당사자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그 폭행으로 2년간의 자격정지 징계처분의 죗값을 치렀고 ‘언제까지 과거의 잘못에 발목이 잡혀야 하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여론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워낙 박철우의 메시지가 강력했다.
구단은 19일 대책회의를 가졌다. 많은 의견이 오간 뒤의 결론은 ‘진실된 사과가 우선이다’였다. KB손해보험은 20일 감독의 시즌 중도하차를 발표한 보도 자료에서도 “이상열 감독이 박철우에게 진심 어린 사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며 자성과 자숙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감독의 2020~2021시즌 잔여경기 출장포기 의사를 수용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14일 OK금융그룹 송명근, 심경섭이 학교폭력에 연루됐을 때의 결정과 같은 모양새다.
이 감독도 구단을 통해 “과거 내 잘못된 행동으로 박철우 선수에게 깊은 상처를 준 것에 깊이 반성하고 있고 사죄하는 마음이다. 시즌 마지막 중요한 시기에 배구 팬과 구단, 선수들에게도 부담을 드려 죄송하다”고 했다. 2010~2011시즌 이후 10시즌 만에 처음으로 봄 배구 진출을 꿈꾸는 KB손해보험으로선 대형 악재다. 당장 21일 봄 배구 경쟁자인 OK금융그룹과 6라운드 경기를 앞두고 선수단이 크게 동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이번 사안이 심각했다. 이 감독이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할 충분한 시간을 줘야 하고, 이를 위해선 최대한 언론과 접촉을 차단할 필요도 있었다. 구단과 이상열 감독은 작심발언 이후 직·간접적으로 박철우와 연락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직접 만나지 못했다. 박철우가 18일 인터뷰 때 “사과 안 하셔도 된다. 굳이 보고 싶지도 않다.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은 전혀 없다”고 강조한 것을 기억한다면 이 감독과 KB손해보험이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박철우가 자신의 아픈 과거를 되새기면서까지 폭력문제를 공론화했던 이유는 배구계에 만연한 폭력을 이번에는 반드시 끊어야 하며 본인이 희생양이 돼도 좋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스스로 잔 다르크가 되려고 작정했기에 KB손해보험과 이 감독에게는 딜레마다. 피해 당사자가 용서하고 화해하는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기 전에는 제대로 이 문제를 매듭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흥국생명 이재영-다영 자매로부터 시작된 학교폭력 여파가 지금 V리그를 혼돈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학교폭력에서 지도자들의 폭력으로 범위는 더욱 넓어졌다. 지금의 상황을 많은 배구인들은 걱정한다. 모두가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언제까지 과거의 일에 집착해야 하느냐’,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도 기회는 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지금 단호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잘못된 과거와 단절할 수 없다’는 것이 대중의 뜻이다.
김종건 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