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배우 해도 되겠어요”, “별 말씀을” 따위의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있자니(실제로 그녀는 배우해도 될 만큼 스타일이 좋은 편이다) 슬슬 공연 시작 시간이다.
무대는 소극장이니만큼 단출하다. 옥상으로 보이는 무대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집이 있다(이 집에는 비밀이 있다). 무대 가운데에는 평상이 하나. 조명을 비추어 낮과 밤을 설정해 줄 뒤쪽 배경. 이게 전부다.
첫 장면에서 평상 위에 고혹적인 자세로 앉아 담배를 피워 문 여인이 등장. 게슴츠레한 눈길을 관객을 향해 쓰윽 던진다. 오늘 공연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황보라가 아니어서 ‘내가 잘못 알았나’하고 프로그램 북을 뒤적이려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봐, 나처럼 섹시한 고양이 처음 봐?”
그녀는 고양이었다. TV판 ‘옥탑방 고양이’와 달리 연극적 아이디어의 성과다. 옥탑에는 남녀 주인공과 함께 암수 고양이가 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암고양이의 캐릭터가 으레 그렇듯 섹시하고 도도한 암고양이는 ‘날씬한 고양이’라는 뜻에서 ‘날고’. 날고와 함께 사는(정확히는 얹혀사는) 뚱뚱하고 못 생기고 단순무지한 숫고양이는 ‘뚱고(뚱뚱한 고양이)’로 불린다.
이들 암수 고양이는 무대의 전반을 지지하는 충실한 조연이다. 날고의 김나미와 뚱고의 조현식은 주인공들이 극을 쥐었다 폈다 하기 쉽도록 멍석을 깔았다 접었다 부지런을 떤다.
두 사람은 고양이역뿐만 아니라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역을 소화하는 ‘멀티’ 역이었다. 김나미는 주인집 아줌마, 남주인공의 여자친구로, 조현식은 여주인공의 남자친구, 남주인공의 괴팍한 래퍼 친구, 주인집 아저씨, 배달원 등으로 분한다. 이 ‘분하는’ 모습이 상당히 재미있어 관객들로 하여금 시종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무대 세트에서는 폈다 접었다 하는 접이식 옥탑집이 관객의 허를 찌른 재미있는 아이디어. 닫으면 평범한 집의 겉모양을 하고 있지만, 양쪽에서 당겨 펴면 순식간에 방안 풍경이 펼쳐진다.
어쨌든 이날 공연의 주연 캐스팅은 김동호(이경민 역)와 황보라(남정은 역). 이왕이면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한 이선호(이경민 역)가 어땠을까 싶지만 황보라의 남정은을 볼 수 있다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한다.
이선호의 공연을 보지 못해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이날 김동해는 상당히 매력적인 연기를 했다. ‘쓰릴미’, ‘그리스’, ‘싱글즈’ 등 주로 뮤지컬 무대에 서 와서인지 움직임에 신선한 리듬감이 넘친다.
훤칠한 키, 깨끗한 마스크 역시 부잣집 아들이지만 봉사활동을 위해 집을 뛰쳐나와 옥탑방에서 살고 있는, 현재는 아니지만 언제든 백마에 올라탈 수 있는 왕자 역에 십분 어울렸다.
대구에서 올라와 방송작가 데뷔를 꿈꾸는 처녀 남정은으로 분한 황보라의 경우 제대로 ‘자기 역’을 맡은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방송, 영화를 통해 보여 주었던 엉뚱 발랄 ‘4차원적 이미지’에 혼자 사는 여자 특유의 ‘후줄근함’, ‘나태함’ 코드를 녹여 얹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유쾌하고 가볍게 떠다니는 전반, 극 전개상 어쩔 수없이 다소 심각해지는 후반 양쪽에서 황보라는 특유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황보라의 감칠 맛 나는 대사 역시 입과 귀에 착착 감기는데, 김동호에게 자신이 왜 마음에 안 드냐며 대구 사투리로 “와? 내 입술이 너무 작나?”할 때는 정말 웃겼다. 황보라야말로 한국 여자연예인 중 가장 두터운 입술을 가진 인물이 아니던가.
“고만 다 때려 치고 집에 내려와 9급 공무원 시험이나 봐라”고 딸을 설득하는 아버지에 맞서는 장면. 아버지가 돌아간 뒤 허탈하게 평상 위에 앉아 울고 있는 황보라의 눈과 코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완벽하게 구멍을 찾아 들어간 감정몰입의 결과다.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여주인공의 복잡다단한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심장 한 구석이 시큰해진다.
한 편의 세련된 동화를 보고난 느낌. 9년이나 된 인터넷 소설이 원작이지만 여전히 구석구석 유머의 감각에 날이 서 있음은 연출가 김태형의 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저나 옥탑방 고양이를 보러 간다니 누군가 “남정은 보러 갔다가 날고에 찍혀 온 사람 많다”는 말을 해줬다. 사실은 그게 아주 과장은 아니었다.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