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영은이상우의행복한아침편지]큰맘먹고가출했는데ㅎㅎ

입력 2008-09-0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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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동네 계모임에 갔다가 본의 아니게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됐습니다. 제가 시골에 살다보니 8시면 버스가 끊깁니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니까 10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저는 미안한 마음에 부랴부랴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마당 앞에서 저를 기다리던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보자마자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신 정신이 있는겨 없는겨? 다 늙은 아녀자가 저녁 늦게 모임에 간다더니 왜 인자 오는겨? 아예 밤을 새고 오지?” 남편의 호통에 저는 미안해서 계속 사과를 했지만 남편은 듣질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정신이 있네 없네” 하면서 제 속을 긁어댔습니다. 그 말을 계속해서 듣자니 저도 화가 났습니다. 사실 요즘 같은 여름철이면 농사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그러다보면 저도 좀 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그래서 계모임에서 노래방에 간다기에 기분 좀 풀고 온 것인데, 좁쌀 같은 영감은 계속해서 잔소리만 늘어놓으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홧김에 “그래유, 어디 정신 있는 여편네 데려다가 잘 살아보슈! 인자 나도 도저히 당신이랑 더 이상은 못살겄네유. 무신 남자가 만날 잔소리에 융통성이 그리도 없슈? 환갑 넘긴 사람 중에 나처럼 남편 잔소리 듣는 여자가 몇이나 되것슈? 내일 내가 당신 눈에서 사라져 주리다!”고 말하고 결혼생활 30년이 넘게 한번도 해보지 않은 가출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첫차를 타고 읍내의 버스터미널로 갔는데, 막상 어디를 가야할지 걱정이 됐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마땅히 갈 곳도 없고 거기다 배꼽시계는 주책없이 왜 계속 울려대는지, 저는 급한 대로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로 아침을 대신했습니다. 어디가 됐더라도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에 애꿎은 버스 시간표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혹시나 남편이 제게 얼른 들어오라고 전화는 하지 않을까 싶어 울리지도 않는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터미널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 수원에 사는 동생 집에나 한번 가보자는 생각이 들어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언니가 웬일이여? 잘 지내지? 내가 지금 제사 준비 때문에 큰 집에 와 있거든, 내가 제사 끝나면 전화할게 미안혀∼”하고는 끊었습니다. 동생에겐 아무렇지 않게 그냥 안부전화였다고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이젠 정말 갈 곳이 없단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면 좋을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번에는 시집간 딸에게 연락해볼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몰골로 갔다간 딸이 부부싸움 해서 친정 온단 말은 들어봤어도 친정엄마가 부부싸움 하고 딸집에 가면 사위 앞에서 무슨 망신일까 싶었습니다. 그냥 대합실의 딱딱한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괜히 드는 생각이 ‘TV에서 집 나온 다른 여자들은 바닷가도 가고 호텔에도 가고, 친구도 만나고 갈 곳도 많던데 왜 나는 갈 곳이 없나’싶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잠잠했던 휴대전화에 ‘우리집’이라며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이 “늙어서 무슨 짓이냐! 얼른 들어오지”라고 했습니다. 그 날만큼은 좁쌀에 왕 소심에 융통성 없는 남편의 목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그래서 못 이기는 척 다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출’ 이거 할게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충남 예산 | 강석분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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