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피플]좌절그리고아름다운도전최향남“101달러?난ML의기적을보여줄거야”

입력 2009-01-2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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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눈앞이 캄캄해지는가 싶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마운드에 올라 막 공 세 개를 던진 참이었다. 털썩. 그대로 쓰러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구급차 안. 너무 어지러워 목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식중독이라고 했다. 최근에 뭘 먹었냐고 의사가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피자와 콜라, 닭튀김 외엔 떠오르지 않았다. 문제는 3주 내내 그랬다는 것. 3일이나 병원 신세를 지고 겨우 퇴원했지만 며칠 후 설사병까지 생겼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겨우 마운드에 오르면서 최향남(38)은 생각했다. ‘살면서 이렇게 힘든 순간도 찾아오는구나.’ 지난해 11월, 도미니카 윈터리그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배시시 웃었다. “견뎌야 하는 시간이니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 말하면서 또 한번 웃었다. 벌써 세 번째 메이저리그 도전. 반대도 많았고 벽에도 부딪혔다. 하지만 그는 일축했다. “내 꿈이고 내 인생이잖아요.” 3월이 오면 최향남은 세인트루이스 행 비행기에 오른다. ○좌절 없던 소년, ‘틈새를 찾아서’ 최향남은 어릴 때부터 뭐든 잘 참았다. 그리고 ‘대책 없이’ 낙천적이었다. 중학교 시절, 동기 스물아홉 명이 ‘맞는 게 지겹다’며 야구를 그만둘 때 그는 ‘어떻게 하면 안 맞고 이 재미있는 걸 계속 할까’를 고민하며 홀로 버텼다. 2003년 LG에서 방출됐을 때도 ‘자유’를 얻은 기쁨에 상처를 잊었다. 12승을 올린 1998년 이후 마음에 품어온 메이저리그의 꿈. 그걸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좌절할 틈이 어디 있나요. 그동안 걸어온 길이 모두 준비 과정이나 다름없는데요.” 방출 직후 미국 구단의 문을 두드렸지만 여지없이 실패했다. 그래서 2005 시즌을 KIA에서 마친 후 다시 클리블랜드로 향했다. 그 때다. 메이저리그의 벽을 실감한 게. “그 전엔 트리플A와 메이저리그의 경계를 잘 몰랐죠. 직접 겪어보니 그 차이가 엄청나더군요. 그래서 실망했냐고요? 아뇨. 더 큰 목표의식이 생겼어요.” 제 아무리 견고한 벽에도 작은 틈새는 있다. 최향남은 메이저리그 30개 팀 중 ‘작은 구멍’이 뚫린 팀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클리블랜드를 뛰쳐나왔다. “투수가 마운드에서 어떤 존재인지 그 때 깨달았으니” 얻은 건 충분했다. 자유계약선수 신분이 아닌 탓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새 팀 롯데와 계약할 때도 ‘해외 진출을 원할 경우 보내준다’는 조항을 넣었다. 그렇게 2년간 다시 몸과 마음을 벼렸다. ○‘눈 먼 도전’을 가능케 한 밸런스 누군가는 ‘눈 먼 도전’이라 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쉬고도 싶었다. 적잖은 나이, 예전 같지 않은 체력. 시즌이 끝나자마자 낯선 나라 도미니카로 날아가는 게 기분 좋았을 리 없다. 오지 않는 스카우트들의 연락을 기다리는 데도 인내심이 필요했다. 부산 팬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으며 계속 안정적으로 야구 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스스로를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투구 밸런스가 최상이라는 판단이 섰다. 몸에 꼭 맞는 밸런스를 찾기 위해 1997년부터 집요하게 노력해온 그다. “정답은 없어요. 그냥 느낌이에요. 몸이 ‘이거다!’ 하고 알아차리는 거죠. 정말 수 백 번씩 시도하고 또 했어요.”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나곤 했다. 작곡가들에게 악상이 떠오르듯 말이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투구 모션을 취해봤다. ‘감’을 찾았다 싶으면 몸에 익히기 위해 끝없이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해 중순, 마침내 ‘이거다!’를 느꼈다. 스스로 ‘더 이상의 밸런스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로 말이다. “이 밸런스로 승부해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 정도로 자신이 있어요.” ○아름다운 끝을 위한 마지막 도전 눈앞으로 다가온 세인트루이스 입단. 마지막이라 생각했기에 더 절박했다. 내년이 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아니다. “문제는 의욕이었어요. 지금 같은 각오를 1년 후에도 유지할 자신이 없었던 거죠.”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빨간 앵무새(세인트루이스의 마스코트)가 찍힌 구단 안내 책자와 CD가 날아왔다. 순간 뭉클했다.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 ‘이제야 운이 열리는구나’ 했다. 하지만 간절함 만큼이나 우여곡절도 많았다. 계약을 3일 앞둔 상황에서 롯데가 포스팅시스템을 제안하고 나섰다. 단 3일이 모자라 FA 자격을 얻지 못한 게 문제였다. “속에서 뭔가 철렁 내려앉는 듯 했어요. 또 한번 인생이 어떤 건지 실감했고요. 그냥 하늘에 맡겨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세인트루이스는 에이전트 존 최의 끈질긴 설득을 받아들여 101달러에 포스팅 입찰했다. 최향남의 ‘마지막 희망’도 그렇게 이뤄졌다. 그는 입찰 소식을 듣자마자 눈을 감고 기도부터 했다. “죽을 힘을 다할 겁니다. 최선을 다할 거예요. 비록 굴곡은 많았지만 아름답게 떠나고 싶어요.” ‘향남’은 사실 그의 두 번째 이름이다. 가족들은 ‘상남’이란 이름을 지어줬지만 출생신고를 담당한 동사무소 직원의 실수로 ‘향남’이 돼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집에서 줄곧 ‘상남이’로 불렸다. ‘향남’이란 이름으로 야구를 하고 유명세를 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소박한 소망 하나를 덧붙였다. “쉰살쯤 돼서 문득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봤을 때, 선한 표정이었으면 좋겠어요. 부족한 부분을 고쳐나가고, 모난 부분은 둥글게 만들어가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최향남이 또다시 웃었다. 언젠가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라서는 그 날에도 꼭 이런 표정으로 웃고 있을 듯 했다. 배영은 기자 y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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