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싶었습니다. 푸른 유니폼을 입은 우리 선수들이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는데, 심판들이 자꾸 분주하게 이리저리 오갑니다.
진작 전광판에 떴어야 할 경기 결과 발표가 계속 늦어집니다. 일어서서 박수를 치고 기뻐하면서도 마음 한 쪽이 왠지 불안해지는 건, 8년 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벌어진 일이 생각나서일 겁니다.
태극기를 위아래로 흔드는 선수들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집니다. 세상이 떠나갈 듯 포효하던 여자팀 최광복 코치의 얼굴도 갈수록 굳어집니다. 그리고 제임스 휴이시 심판이 최 코치에게 다가옵니다.
잠시 후 밴쿠버 퍼시픽 콜리세움은 동메달에서 은메달이 된 캐나다와 노메달에서 동메달이 된 미국 관중의 함성 소리로 뒤덮입니다. 또다시 가장 먼저 들어오고도 실격. 2010년 2월 25일(한국시간) 벌어진 일입니다.
박승희는 입술부터 깨물고, 이은별의 벌어진 입은 닫히지 않습니다. 김민정의 눈물은 기쁨에서 슬픔으로 바뀌고, 조해리는 무릎을 짚고 고개를 숙입니다. 믹스트존에서도 그랬습니다. 기자들 앞을 지나치는 선수들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습니다.
박승희도 조해리도 김민정도 “우리가 왜 실격됐는지 모르겠다”고 한 마디씩 남긴 채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할 말을 잃고 태극기를 떨어뜨리던 김동성의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난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3000m 계주에 ‘목숨을 걸었던’ 그녀들입니다. “4연패를 이뤄놓은 선배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다른 건 몰라도 계주에서는 꼭 금메달을 따고 싶다”고 강조했던 그녀들입니다. 쇼트트랙 훈련장을 찾을 때마다, 훈련시간 대부분을 계주 연습에 할애하는 그녀들을 보면서 그 집념에 혀를 내두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미니홈피에 “우리 네 명은 강하다! 얘들아, 저녁에 서로 마주보며 웃자”라는 일기를 쓰고 경기장으로 떠났던 김민정은 숙소로 돌아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아침에 쓴 글을 보고 아직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하늘이 우릴 돕지 않는구나.” 최 코치도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겼습니다. 단지 심판만이 인정하지 않을 뿐이죠.”
비록 뜻하지 않은 ‘사고’로 눈앞의 금메달을 놓쳤지만, 대한민국은 그녀들의 아픔을 잊지 않을 겁니다. 2002년의 김동성이 여전히 우리에게 ‘금메달리스트’로 기억되듯 말입니다.
밴쿠버(캐나다)|배영은 기자 yeb@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