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경기] 김용수, 8회 1사만루 구원…“필사의 1구가 먹혔다”

입력 2010-03-05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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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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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의 1994년 KS 1차전
1-1 동점상황 막판 승부처
상대는 태평양의 주포 김동기
풀카운트서 뿌린 몸쪽 슬라이더
땅! 3루땅볼…기막힌 병살 유도
그후 11회까지 10타자 퍼펙트투
김선진 끝내기포로 짜릿한 승리

일본의 괴짜선수 신조 쓰요시(은퇴)는 이치로와의 비교를 주문받자 이런 말을 남겼다. “이치로는 기록으로, 나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야구는 ‘언제’와 ‘얼마나 많이’가 끝없이 양립하는 종목이다. 단 대중의 기억은 ‘굵게’를 선호한다. 1982년 불꽃을 태운 박철순, 1983년 30승을 거둔 장명부, 1984년 한국시리즈의 영웅 최동원처럼.

물론 선동열 이종범 이승엽처럼 굵고 길게 간 희귀사례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한국야구는 감독의 야구가 됐다. 스타의 야구가 아니라 팀워크의 야구로 변했다. 이 지점부터 ‘길게’ 가는 선수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조웅천, 류택현, 전준호 등…. 그들의 생명력과 기록은 성실함의 표본이다. 그리고 그 원조는 김용수(현 LG 스카우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송(老松)으로 불린 김용수는 프로야구 최초의 100승-200세이브 투수다. 정규시즌만 16년간 613경기(126승-227세이브)를 던졌고, 마무리의 개척자로 꼽힌다. 평범한 체격과 외모로, 타고난 불같은 강속구 없이도.

마흔 살까지 현역이었던 김용수의 클라이맥스는 어디쯤일까. 의외로 그는 망설임 없이 1경기를 골랐다. 1994년 한국시리즈 1차전(10월18일·잠실구장).

○더 정확히 말하자면 8회 1사 만루 태평양 5번타자 김동기와의 대결, 그 순간이었다. “4번타자 김경기 타석 때 나갈 줄 알고 준비했다. 그런데 이광환 감독이 차동철을 먼저 내보냈다. 볼넷이었다. 만루가 됐다.” 막판 승부처의 1-1 동점 상황. “위급한 상황에 나가려니 나도 긴장됐다. 그런데 1구를 던지니 마음이 편해졌다. 포수 (김)동수를 믿고 던졌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몸쪽과 바깥쪽 직구를 던졌다. 그 다음부턴 유인을 했는데 안 속았다.” 풀카운트. 6∼7구는 파울이었다. 3구부터는 전부 슬라이더였다. “김동기가 장타력이 있어 직구로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승부구는 몸쪽 슬라이더로 갔다. 돌이켜봐도 최고의 구질, 최고의 코스였다. 3루 땅볼이 나왔다. 병살타. 그 순간 우리가 이겼다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흔히 ‘역사는 승자만 기억한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1994년 1차전만 봐도 그렇다. 사람들의 뇌리엔 당시 패전투수 김홍집의 비장미가 더 강렬하다. 141구. 11회말 1사까지 홀로 던졌다. 8회 이후 김용수와 김홍집의 투수전은 폴 클래식의 백미였다.



“솔직히 11회까지 갈 줄 몰랐다. 김홍집 공이 빠르진 않았는데 제구력이 기가 막혔다. LG는 투수 분업화가 돼있어서 이광환 감독님도 무리를 안 시키려고 연장까지 대비해 내 등판시기를 한 템포 늦췄을 거다. 그러나 내가 올라온 이상 ‘내 뒤엔 투수가 없는 거다’ 그런 심정으로 던졌다. 아마 계속 1-1로 갔으면 15회까지 던지지 않았을까?” 11회까지 3자 범퇴의 행렬. 11회 1사 후 LG 대타 김선진의 끝내기 홈런이 터지고서야 불멸의 투수전은 끝났다. 정작 김용수는 12회 등판을 준비하느라 그 순간을 제대로 목격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1차전의 영웅은 김선진이었다,

김용수가 아니라. 그것이 숙명일지도.

○김용수는 내성적이다. 후배의 승리를 날리거나, 신문에 ‘방화범’이라고 실린 걸 보면 며칠을 앓았다. 그래서 늘 선발을 원했다. 사실 마무리 전업도 자의가 아니었다. 1986년, 선발로 잘 안돼 간 곳이 마무리였는데 특유의 포커페이스가 벤치의 마음에 들었다. 달갑진 않았으나 당시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충동적 결정이 한국야구의 역사를 바꿨다.

김용수는 오히려 그런 성격이 마무리에 더 적합했다고 평한다. “마무리는 하고 싶다고 되는 자리가 아니다. 결정적일 때 맞는 경우가 생기니까 마음을 추스를 줄 아는 사람이 어울린다.” 김용수는 냉정하다. 그리고 성실하다. 전력분석의 개념조차 희미했던 그 시절에 경기를 마치면 집에 들어가 홀로 복기를 했다. 축구선수 히바우두의 고백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날보고 천재라고만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김용수는 LG 창단 후 두 번의 우승에서 두 번 모두 MVP였다. 그에게 물었다. 과연 김용수 스타일의 마무리 후계자가 있냐고.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지금은 없어요. 지금은….” 그러고 보니 이젠 마무리도 ‘짧고 굵게’ 사는 화려한 보직이 됐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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