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이승호. 스포츠동아 DB
# SK 마무리 이승호(사진)는 14일 대전 한화전에서 9회말 마지막 타자 오선진을 스탠딩 삼진 잡을 때 느린 커브를 던졌습니다. 이 결정구를 던지기 전, 이승호는 마운드에서 잠시 발을 뺐습니다. SK 경기를 즐겨 보신 분들이라면 알 텐데요, 투수가 포수 사인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걸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포수 박경완이 투수들 사이에서 어떤 위상으로 각인돼 있는지를 실감케 해주는 대목이지요. 그렇다고 SK 투수들 얘기를 들어보면 박경완이 권위적인 스타일은 아니라고 하네요. 오히려 “너희들이 던지고 싶은 대로 던지라”는 오픈 마인드랍니다. 즉 SK 투수들 사이에선 ‘박경완이 던지라는 대로 던지면 거의 옳다’란 암묵적인 믿음이 형성된 셈입니다. 때문에 그런 박경완이 내는 사인을 고개를 흔들어서 직접적으로 ‘그 공 던지기 싫다’라고 표시하는 것은 예우가 아니라는 생각이겠지요. 대신 SK 투수들이 취하는 암묵적 동작이 발을 잠깐 빼거나 견제구를 던지는 것이랍니다. ‘다른 공을 던지고 싶으니 고려해주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는 행위이죠.
# 투수의 제구력은 상대적이고 변화무쌍합니다. 똑같은 코스에 똑같은 구질을 던지라고 해도 납득하고 던지는 것과 강요해서 하는 것의 차이는 크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SK의 특별함이 숨어있습니다. 박경완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소모적 회의를 없애는 것이죠. 투수가 경기 전 감독을 찾아가 ‘특정 포수와 배터리를 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서울 어느 팀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겠지요.
# ‘조바깥’, ‘강몸쪽’이라는 모독에 가까운 조어가 들리는 팀들이 있습니다. 과연 정말 그런지부터 다시 생각해볼 일입니다. 설령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지를 살펴야겠죠. 감독이 몸쪽 승부를 집요하게 요구해 그랬다면 포수에게만 책임을 씌울 수 있을까요? 게다가 포수는 투수의 공을 받아주는 보직이니만치 제구력 난조까지 컨트롤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포수의 책임이 면책되는 것은 아닙니다. 투수가 자기 리드에 승복하지 않는다면, 감독이 자꾸 게임에 개입하려 든다면, 그 포수는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꺼내놓고 자기 의견을 표시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귀담아 듣고 합리적 절충안을 찾아내는 팀이 발전하는 조직, 즉 강팀이 됩니다. 포지션마다 스타선수들을 모아놓았다고 강팀은 아니겠죠. A팀에서 보잘 것 없던 선수가 B팀 가서 펄펄 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강팀의 비밀은 상호 신뢰에 있습니다. 그리고 신뢰는 소통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요.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