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원로 김양중 씨는 2008년 문학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 두산-SK전에 앞서 시구를 했다. 김 씨는 1954년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야구대표팀에서 투수로 뛰었다. [스포츠동아 DB]
가운데는 야구대표팀과 기념촬영에 응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
야구 첫 국가대표 투수 김양중 씨 ‘1954년의 추억’
최초 야구대표팀 선수 고작 18명제1회 亞 선수권 참가 필리핀행
식사 입에 안맞고…물배만 채워
처음 해본 야간경기 신기하기만
요즘 선수들 보면 격세지감 느껴
국가대표 자긍심은 변치 말아야《10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야구-. 모든 운동선수들이 그러하듯 야구선수들에게도 태극마크는 선망의 대상이다. 2년 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한국야구는 11월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한번 아시아 평정에 나선다. 6일 발표된 최종 엔트리 24명의 면면을 살펴보더라도 광저우 하늘에 한국야구의 금빛 물결이 출렁일 것이란 예감이 든다. 하지만 영광스런 오늘이 있기까지 한국야구가 지나온 길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야구국가대표-. 그곳은 숱한 시련 속에서도 꿋꿋하게 꿈과 희망을 키워온 한국야구 레전드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공간이다. 그 전설의 흔적을 더듬어본다.》
일제시대의 핍박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나온 세대들. 그들에게 젊은날의 초상은 어둠과 질곡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어깨를 펴고 세상을 향해 두 팔을 벌릴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가슴에 새겨진 태극마크, 그리고 대한민국이었다.
대한민국 야구사상 최초의 국가대표, 1954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대표팀이다. 그해 5월 14일 마닐라에서 아시아야구연맹이 결성됐고 한국 일본 필리핀 자유중국(현 대만) 4개국이 초대 회원이었다. 한국은 당시 이홍직 대한야구협회장과 이영민 부회장을 대표로 보내 연맹에 가입했다. 이영민은 오늘날 고교 최고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의 그 이영민이다. 그러면서 그해 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아시아야구연맹이 창립된 마닐라에서 첫 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한국 최초의 국가대표팀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코칭스태프는 감독 김영석과 코치 오윤환 1명씩으로 구성됐다. 그리고 투수는 달랑 4명. 유완식 박현식 김양중 서동준이 주인공이다. 포수는 장석화 김영조 2명이었고, 내야수는 김정환 심양섭 박상규 김계현 이기역 강대중 이덕영 등 7명, 외야수는 노정호 허곤 장태영 홍병창 정관칠 등 5명이었다. 선수는 총 18명에 불과했다. 물론 이들 중 투수와 야수를 겸하는 선수도 많았다. 굳이 인위적으로 포지션을 구별하자면 이렇게 구성됐던 것이다.
한국 최초의 국가대표팀이 구성된 제 1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는 창립멤버인 한국 일본 자유중국 필리핀 등 4개국이 참가했다. 여기서 한국은 일본에 0-6, 필리핀에 4-5로 패한 뒤 자유중국에 4-2로 승리했다. 국가대표 최초의 승리였다. 필리핀이 3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하고, 일본이 2승1패로 2위, 한국은 1승2패로 3위에 그쳤다. 자유중국은 3전패로 4위였다.
당시 대표팀의 모습은 어땠을까.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대표 선수 18명 중 현재 생존자는 단 3명에 불과하다. 그 중 야구원로 김양중 씨에게 그 시절의 추억을 들춰봤다. 김 씨는 80세의 고령이지만 아직도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비상한 기억력을 발휘했다. 아니, 그 시절만 생각하면 세월이 되돌아가기라도 하는 듯 추억의 편린들을 술술 풀어나갔다.
“그때 멤버 중 살아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3명밖에 없소. 당시 주장을 맡았던 노정호 선배는 미국에서 살고 있어요. 나보다 열세 살이 많으니까 올해 나이가 아흔 셋일 겁니다. 그리고 서동준이, 그 친구는 나보다 다섯 살 아래요. 나와 함께 인천에 살고 있소. 나야 광주서중(현 광주일고) 출신 촌놈이지만 서동준은 인천 토박이지. 다들 저 세상으로 가고 우리 셋이 살아있다니…. 세월이 참 빠르고 허무합니다.”
그는 살아 있는 자보다 떠나간 자들에 대한 회상으로 목소리가 잠기기도 했다. 그래도 그 시절을 다시 한번 추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기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흥이 나는 모양이다.
“해방 후 첫 대표팀이 구성되면서 우리 선수들은 먼저 이영민 선배 묘소에 가서 술을 한잔 따랐어요. 거기서 출정식을 한 거지. 이 선배는 우리나라 야구발전을 위해 헌신하다가 그해 8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영민은 일제시대에도 일본프로야구 선수들조차 존경심을 나타낸 야구천재였다. ‘조선의 4번타자’이자 ‘조선의 에이스’ 이영민은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 개장 이후 첫 홈런(1928년 6월 8일 연희전문 소속으로 경성의전 상대)을 친 주인공이자 일본프로야구팀의 스카우트 표적이 되기도 했다. 1934년 베이브 루스가 포함된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조선 선수로는 유일하게 일본 대표팀에 뽑힐 정도의 실력파였다. 김 씨는 잠시 회상에 잠긴 뒤 대표팀 뒷얘기들을 풀어냈다.
“사실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했는데, 대표팀 선수들은 일단 이영민 선배 묘소를 먼저 참배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첫 해외원정을 가게 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게지요. 그리고 나서 대통령을 예방했습니다.”
정부에서는 대한민국 최초 야구대표팀의 해외 원정길에 군용비행기를 내줬다. C-46 공군 수송기였다.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가는 직항 비행기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12월에 영하 10도가 넘었소. 여의도에서 비행기를 타려는데 어찌나 추운지. 군용 비행기로 일단 홍콩으로 가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필리핀으로 날아갔지요. 우리는 가슴에 태극마크를 처음 달아봤어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비행기도 처음 타봤을 겁니다. 그런데 사단이 났어요. 광목으로 만든 단복을 입었는데 여름 옷감을 구할 수 없어 흰 옷감에 감색 물을 들여 입고 떠난 게지요. 추워서 단복 안에 흰 셔츠를 입었는데, 당시 공군 수송기에 냉방이 됩니까. 땀을 비오듯 흘리니까 단복 염색물이 빠져 와이셔츠까지 다 엉망이 돼 버렸지요. 홍콩에서 반소매 티셔츠를 구입했는데 그게 단복으로 둔갑해버린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믿기 힘든 얘기지만 에피소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필리핀에 도착하니 40도가 넘습디다. 마닐라 호텔에 묵었는데 모든 것이 신기했지. 아침에는 빵만 나오고, 식사를 하려고 해도 양식밖에 안 나와요.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도 않고. 다들 물만 먹고 경기를 했지요. 물론 그 경험 때문에 2회 대회부터는 고추장을 가지고 갔지. 엘리베이터도 처음 타보고, 침대에서도 처음 자 보고….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호텔에 양변기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한국에는 미군부대에나 양변기가 있었지 어디 구경이나 했겠습니까. 다들 변을 보지 못하면서 엄청 고생했지요. 그것보다 밤에 불 켜놓고 야구를 하는 게 신기했어요. 야간경기를 처음 해보니 가지고 있는 실력을 발휘할 수나 있었겠습니까.”
대한민국 최초 국가대표 선수였던 그는 오늘날 한국야구 발전을 누구보다 가슴 뜨겁게 자랑스러워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메이저리그 선수로 구성된 서양선수들을 제치고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을 차지한 사실에 감격해했다.
“요즘 국가대표 선수들은 우리 때와 비교하면 얼마나 대우를 잘 받아요. 그렇지만 이젠 우리가 이런 얘기하면 다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라고 하겠지요. 요즘 선수들 국가대표로 뽑히는 게 귀찮을 수도 있어요. 시대가 변했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 변하지 말아야할 것은 있어요. 가슴에 단 태극마크에 대한 자긍심, 바로 그거요. 야구가 아니었으면 언제 국가대표가 돼 보겠습니까. 국가대표 말이요.”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출처|한국야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