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임권택. 스포츠동아DB
‘으악새’ 조롱 받던 액션 암흑시대
90년 임권택 ‘장군의 아들’로 종식
“액션영화 계보 없는 현실 아쉬워”
‘으악새.’
영화 속 인물들이 주먹과 총탄에 쓰러질 때 ‘으악, 으악!’ 비명을 지른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한때 한국 액션영화에 출연하는 연기자나 관련 스태프를 말할 때 사람들은 그렇게 조롱하듯 별칭을 붙여줬다.
1960년대 이후 활짝 꽃피운 한국영화의 확연한 한 갈래이면서도 액션영화는 ‘으악새 영화’라는 천대 아닌 천대 속에 그 장구한 역사를 써내려갔다.
그 역사의 첫머리에 오르는 사람은 정창화 감독이다. 1953년 ‘최후의 유혹’으로 데뷔한 그는 약 30여편의 액션영화를 연출했다. 정 감독은 1960년대 홍콩 쇼브라더스로 건너가 ‘천면마녀’ 등으로 무협영화에 도전, 미국과 유럽까지 이름을 알렸다. 1972년엔 ‘죽음의 다섯손가락’으로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액션영화 감독으로서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당시까지 한국 액션영화는 ‘뒷골목 깡패’ 혹은 협객의 비장한 영웅담과 만주 벌판 독립군의 활약담, 할리우드 서부극을 원형으로 한 한국식 웨스턴의 양태를 형성했다. 1970년대 들어 이소룡과 ‘소림사’로 상징되는 홍콩 무협영화의 등장으로 한국 액션영화는 일대 위기를 맞는다. 그런 가운데 ‘팔도사나이’(1969년 )의 김효천 감독이 연출한 ‘실록 김두한’ 이후 본격적인 주먹 세계 이야기로 액션영화의 계보를 이어갔다.
청룽(성룡)식 홍콩 액션이 극장가를 장악한 1980년대에 한국 액션영화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정진화, 김정용 감독 등이 나름의 액션을 선보였고 무술감독 원진의 역할이 두드러졌지만 액션 팬 관객을 사로잡은 ‘청룽식 액션’의 힘은 거셌다.
1990년 임권택(사진) 감독의 ‘장군의 아들’은 한국 액션영화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평가받는다. 임권택 감독은 한국 액션영화를 전성기를 이룬 정창화 감독의 제자이다. 자신의 스승처럼 임권택 감독은 1960년대부터 사극과 활극, 초기 ‘한국형’ 느와르 등 장르를 불문하며 액션영화의 한 축을 이뤘다.
이후 한국영화는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으며 김영빈, 장현수, 김성수, 류승완 등 걸출한 액션영화의 스타 감독들을 양산했다.
“체육관 이름을 딴 ‘관장’, ‘무술사범’, 아니면 그저 스턴트맨의 이름으로 불렸던”(박정률 무술감독) ‘무술감독’들이 영화에서 정식 크레딧을 얻은, 전문적 액션 연출자들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정두홍, 신재명, 양길영, 전문식, 이홍표, 박정률, 주용민 등 현재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박정률 무술감독은 “한국 액션영화의 면면한 계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는 이 계통의 척박한 상황을 말해준다”면서 새로운 한국 액션영화의 흐름을 기대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