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AG스타] “진통제 맞고 AG 2연패…‘마녀’로 불렸지”

입력 2010-11-1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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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한국 육상 사상 첫 2연패, 그리고 22년간 이어진 한국신기록을 남긴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 스포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화려했던 그 시절을 담담하게 추억한 그녀는 광저우아시안게임에 출전한 모든 후배 선수들에게 ‘파이팅!’을 외쳤다.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포환 잡은지 딱 1년만에 한국신기록 괴력
1970년 금 이어 1974년 부상속 우승투혼
철녀 이미지 뒤 부상·불면증 시달리기도
박대통령“인간승리 감동” 위로에 힘 불끈
이번엔 농구대표 ‘김계령 엄마’로 AG응원
고 운 화장, 단정한 옷차림, 온화한 미소. 저만치에서 한 여인이 걸어온다. 남들보다 한 뼘 더 큰 키만 빼면 그저 우리네 어머니와 다를 게 없다.

백옥자(59). 한국 육상 투포환의 선구자. 그녀는 이제 한 남자(김진도 부천대 생활체육과 교수)의 아내이자 아들 호연(골프 티칭프로)과 딸 계령(신세계 프로농구선수)의 어머니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한국 아시안게임 역사는 여전히 그녀의 이름을 ‘전설’로 기억한다. 찬바람의 기세가 다소 꺾인 16일 오후, 서울 잠실동 인근 커피숍에서 백옥자를 만났다. 화려했던 옛 이야기가 시작되자, 그녀는 잠시 ‘아시아의 마녀’로 돌아왔다.

● 1970년 방콕을 놀라게 한 ‘샛별’


1970방콕아시안게임. 투포환 경기를 앞둔 여자 선수들이 술렁였다. 투원반에서 깜짝 동메달을 따낸 갈래머리 한국 소녀가 몸을 풀기 시작해서다. 키 176cm에 몸무게 89kg. 체격은 물론 기(氣)도 남달랐다. 소녀는 결국 대회 신기록(14m57)으로 시상대 맨 꼭대기에 섰다. 그 때부터였다. ‘백옥자’라는 이름 석 자를 아시아가 주목하기 시작한 건.

“어릴 때부터 운동을 곧잘 했거든. 중3 때 인천에서 신인 발굴 체육대회가 열리니까 다들 나가보라는 거야. 1968멕시코올림픽 국가대표가 필요한데, 육상은 영 인기가 없었으니까. 딱 1년 투포환을 하고 최연소로 멕시코에 갔는데, 거기서 14m20을 넘겼어. 그게 17년 만에 한국기록을 깬 거라고 하던데. 그 후로 2년 더 하고 아시안게임 1등한 거야.” 1년 만에 한국 최고, 그리고 2년 만에 아시아 정상. 게다가 4년 후 이란 테헤란에서는 처음보다 더 놀라운 두 번째 금메달을 따냈다.


● 1974년 테헤란을 달군 ‘아시아의 마녀’


“테헤란에는 중국에서 진짜 거인 같은 선수들이 나왔어. 기록도 더 좋았고. 난 아픈 왼쪽 무릎이 퉁퉁 부어서 진통제를 맞고 나갔거든. 그런데 16m96을 던져서 또 금메달인 거야. 그걸 본 다른 나라 남자 선수들이 나를 스타디움에서 업고 나갔어. 박수가 엄청나게 쏟아졌지.” 한국 육상 사상 첫 아시안게임 2연패. 백옥자는 그 유명한 ‘마녀’라는 별명을 얻었고, 대한체육회는 “고생한 선수들에게 보상이 필요하다”며 연금 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한국 기록은 28년이 지난 2002년에야 깨졌다.

하지만 테헤란의 추억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난해 목포에서 육상 초청대회가 열렸을 때야. 중국팀 감독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거야. 누구냐고 했더니, 그 때 은메달을 딴 중국 선수라는 거지.” 그 때 금메달을 빼앗아 갔던 ‘참 좋은 선수’를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었다고 하더란다. 한 때 독기 품은 경쟁자였던 두 사람은 25년 후 한국에서 재회해 추억에 잠겼다.


● 끝없는 희생, 그리고 대통령의 한 마디

아무리 재능을 타고났다 해도, 금메달을 거저 딸 수는 없다. 그 뒤에는 길고 끝없는 고행(苦行)이 숨어 있다. “스물둘, 스물셋에 태릉선수촌에 갇혀 있으려니 정말 외롭고 우울했어. 동료도 없지, 외출도 못 하게 하지, 담장에는 가시철망이 둘러 있지…. 사실 두 번 탈출도 했어. 곧 감독 선생님이 잡으러 오셨지만.” 훈련 역시 고됐다.

추운 겨울, 허허벌판에서 눈을 맞으며 훈련하다 보면 포환이 스치는 턱 아랫부분에 피멍이 들곤 했다. 4kg이 넘는 포환을 늘 팔에 끼고 다니는 것도 지겨운 일. “밥 먹을 때도 식당에 들고 갔거든. 농구 대표팀 선배들이 지나가면서 ‘우리는 공에서 바람이라도 뺄 수 있지만 너는 어쩌냐’면서 혀를 차고 그랬어.”

‘백옥자’라는 이름에 쏠린 기대도 짐으로 돌아왔다. “나갈 때마다 한국 기록이고 금메달이니까, 나중에는 기록 못 깨고 1등 못 하면 다들 ‘에이, 뭐야’ 하는 거야. 경기 전날은 긴장 때문에 잠도 안 오고, 대회가 끝나면 일주일 동안 걷지를 못 하는데도 말이야. 그 고통을 누가 알겠어. 그런데도 오로지 ‘희생’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생겼다. TV로 백옥자를 지켜본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들인 것이다. “너를 보고 인간 승리의 감동을 느꼈다. 오래오래 한국 육상의 기둥으로 남아라.” 두둑한 금일봉과 기념촬영, 그리고 따뜻한 한마디.

“우리나라 대통령이 나를 인정해 주는구나 싶어서 가슴이 벅찼어. 그런 보람으로 지금까지 온 것 같아.” 1978년 은퇴해 체육 교사가 됐지만, 7년 후 “선수가 없다”는 대한체육회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다. 백옥자는 복귀 1년 만에 1986서울아시안게임 4위에 올라 나이도 공백도 무색한 위력을 뽐냈다.


● “내 딸 계령이와 후배들, 모두 장하다!”

보약 한 번 못 먹고 쉼없이 포환을 던졌던 아픔. 그래서 백옥자는 딸 계령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든 해주면서 살았다. 모녀는 4년 전 도하아시안게임에 여자대표팀 총감독과 여자농구 대표선수로 동반 출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끔은 나도 요즘 선수들처럼 관리했다면 아시아가 끝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 그래서 계령이에게는 의사, 매니저, 언니 역할까지 다 하려고 해. 이렇게 엄마 뒤를 이어 태극기까지 달아주니 영광이지.”

백옥자는 얼마 전 딸에게 문자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김계령 엄마’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달아줘서 고맙다”고. 운동하는 선배로서 대견한 마음은 다른 후배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금메달, 그거 정말 힘들게 따는 거야. 아시아 최고가 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해? 난 메달 따는 모든 선수들을 존경해.”

배영은 기자 yeb@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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