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장채근 감독 ‘100-3 홈런’의 아쉬움…나머지는 후배들이 채운다

입력 2012-07-05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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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야구계를 떠났다가 홍익대 감독으로 돌아온 장채근. 그는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젊은 시절의 열정을 후배들에게 전수할 생각이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

0.1톤 해태 안방마님…홍익대 감독으로 후진 양성


선동열 이강철 전설들 공 받아
주연 아닌 조연 포수로선 행운

88년 최고 성적 불구 연봉 실망
“잘해봐야 뭐해” 야구열정 식어
“지금 같았으면 열심히 했을 것”

욕설한 관중과 덕아웃서 독대
“그 다음부터 내 욕은 안하더군”


선수 시절 별명은 ‘노지심’. ‘수호지’의 주인공처럼 배트를 휘두르면 상대 투수들은 벌벌 떨었다. 0.1톤의 푸짐한 몸으로 해태의 홈을 지켰다. 상대의 스파이크에 살이 찢겨도 홈 플레이트를 열어주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보다 투수를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투수들은 좋아했다.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 선동열을 껴안고 우승의 감격을 표출하던 사진은 해태의 호시절을 상징한다. 장채근(48). 10년간 97개의 홈런을 친 뒤 은퇴해 해태∼KIA∼히어로즈에서 배터리코치를 했다. 한동안 야구를 떠났다가 홍익대 감독으로 컴백했다.


○해태 원년 멤버가 될 뻔했던 1982년의 추억

1982년 프로야구 원년 멤버가 될 뻔했다. 광주상고 졸업반 때 성균관대 진학을 결정하고, 서울 도봉동에서 합숙훈련을 할 때였다. 해태 조창수 코치가 찾아왔다. 창단 당시 포수가 약했던 해태는 장채근을 탐냈다. 계약금 2200만원을 제안했다. 특급선수 김봉연이 2100만원을 받을 때였다. 엄청난 대우였다. 당시 광주 운암동의 아파트가 300만∼400만원 할 때였다. 솔깃했다. 마음이 흔들려 짐을 쌌다. 성균관대에서 난리가 났다. 가족을 동원했다. 아버지가 대학에 가라고 설득했다. 결국 주저앉았다. 여기서 단짝 한희민, 김태원을 만났다. 이들은 3학년 때부터 대학야구의 강자가 됐다.


○독학으로 배운 포수 리드

1986년 해태에 입단했다. 김정수, 차동철, 김평호 등이 동기다. 입단 2년간 좌절했다. 주전 자리를 기대했지만 팀에는 재일동포 포수 김무종이 버티고 있었다. 경쟁자로 생각했을까. 김무종은 어떤 기술도 알려주지 않았다. 눈치껏 보고 스스로 배워야 했다. 1987년 대구에서 계기가 찾아왔다. 삼성전. 모처럼 선발로 출전했다. 경기가 무르익을 무렵 대타로 교체됐다. 분노가 폭발했다. 배트와 헬멧을 집어 던졌다. 술을 마셨다. 이튿날 새벽 4시 원정 숙소 김응룡 감독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그 이후 일에 대해선 야구계에 여러 소문이 나돌았지만, 장채근은 끝내 입을 다물었다. 하소연만 했다고 했다.

1988년 대만에서 벌어진 전지훈련. 태어나서 가장 많은 훈련을 했다. 악으로 했다. 고교 선배 이순철이 장채근을 이끌었다. “억울하면 실력으로 감독에게 보여줘라”며 배트를 쥐어줬다. 새벽까지 방망이를 돌렸다. 분노의 스윙이었다. 땀은 배신하지 않았다. 개막전에서 선발로 나섰던 김무종을 대신해 투입됐다. 마침 김무종은 하향세였다. 그날 이후 주전 포수는 장채근이었다. 야구하면서 가장 화려한 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26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팀 선배 김성한과 홈런왕 경쟁을 했다. 타점 2위에 골든글러브까지. 장채근의 해였다. 김응룡 감독이 농담을 던진 유일한 기억도 이때 나왔다. “전주구장이었다. 덕아웃 시멘트 바닥에 앉아 땀을 닦고 있는데, 감독이 ‘홈런 몇 개 쳤냐? 홈런왕 하겠다’고 말을 건넸다. 나를 인정해주는 것 같아 그때 가장 기분이 좋았다.”


○300만원 인상에 좌절하다!

프로야구 10년간 97홈런을 기록했다. 1988년의 화려한 성적을 기억한다면 의외의 결과다. 이유가 있었다. 목표 상실이었다. “88년이 끝난 뒤 연봉협상을 하는데 구단에서 300만원을 올려준다고 했다. 25% 상한선 때문이었다. 회의감이 들었다. 그렇게 하고도 25% 인상이면 다음해에 잘 해봐야 무슨 결과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대충 야구를 했다. 훈련도 대충했다. 열의가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가장 후회하는 대목이다. “지금 같은 연봉만 줬어도 열심히 했을 텐데. 아무리 상황이 그렇더라도 끝까지 했어야 했다. 해놓고 봐야했다. 야구 오래 못한 것, 홈런 100개를 채우지 못한 것이 더욱 후회스럽다.”

그래도 아직 화려한 기억은 하나 더 남아 있다. 1991년 빙그레와의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에 오른 순간이었다. 해태가 빙그레를 4승무패로 압도한 그 시리즈에서 펄펄 날았다. 마운드에서 달려 내려오는 선동열과 포옹하는 그 장면은 야구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3차전에서 8회 2사까지 퍼펙트를 이어가던 송진우에게 결승타를 날린 장채근이었다. “시리즈를 앞두고 내가 장담을 했다. MVP는 내 차지라고. 컨디션도 좋았고 열심히 했다. 빙그레 전력도 좋았지만 해태가 더욱 강했다.”


○최고의 투수들과 함께 했다!

포수로서 운이 좋았다. 프로야구에 남을 빼어난 투수들과 함께 했다. ‘야구에서 주연은 포수가 아니라 투수’라는 생각을 누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깨우쳤다. 그래서인지 해태 투수들은 그를 좋아했다. 선동열은 모든 것을 맡겼다. 이강철도 그랬다. 조계현은 모든 것을 자신이 다 결정하려고 했다. 그대로 들어줬다. 김정수, 이상윤, 문희수, 신동수, 송유석 등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좋은 투수들의 공을 다 받았다. 궁금했다. 지금까지 받아본 공 가운데 최고의 구위는 언제, 누구였는지. 대답은 의외였다. 성균관대 4학년 때 받아본 한희민의 공을 첫 손에 꼽았다. “마치 병마개를 던지듯 공이 살아 올라왔다. 마구였다”고 회상했다.

해태는 1997년까지 배터리코치도 없었다. 독학을 했다. 이론과는 동떨어졌지만 투지는 대단했다. 홈에서 상대 타자들이 파고들면 몸으로 깔아뭉갰다. 슬라이딩하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심판 몰래 주자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홈에선 누구에게도 밀지지 않는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다 큰 부상을 입었다. 태평양전에서 홈으로 들어오던 정진호의 스파이크가 오른쪽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뼈가 보일 정도로 상처 부위는 깊었다. 선수생활을 위협했던 부상. 한동안 경기에 나가지 못했다. “상대가 뛰어 들어오면 비켜줘야 하는데 난 그러기 싫었다. 주자를 죽여야 했으니까.”

투지 넘치는 시절에 나온 아날로그 스타일의 해프닝 하나. 1989년 대전 원정 때 자신을 욕하던 팬을 찾아서 관중석까지 쳐들어갔다. “원정팀 덕아웃 위에서 그렇게 욕을 하던 팬이었다. 화가 나서 관중석으로 올라가 끌고 내려왔다. 덕아웃 옆에서 단둘이 얘기를 했다.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은 다른 해태 선수들을 욕해도 나에게는 욕을 하지 않았다.”

장채근은 해태 시절 선동열, 이강철, 조계현 등 명투수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명포수로 각광 받았다. 장채근(오른쪽)이 1991년 한국시리즈 MVP 수상 후 이순철과 어깨동무를 한 채 기쁨을 나누고 있다. 스포츠동아DB




○노무라와의 대화, 야구를 새롭게 배우다!

2006년 일본으로 연수를 갔다. 그동안 해왔던 것을 확인해보고, 좀더 보고 싶어서였다. 라쿠텐 초대 사령탑 노무라 가쓰야 감독으로부터 포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2군에서 4개월을 지내자 노무라가 1군으로 불렀다. 그때부터 일문일답의 포수강의가 계속됐다.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을 모아놓고 문답을 주고받은 것과 비슷했다. 어떤 상황을 놓고 “너라면 어떻게 하겠냐”며 노무라가 물었다. 장채근이 대답하면 노무라가 말을 이어가면서 포수에 대해 토론을 했다. “그동안 본능적으로 알고 지냈던 것들, 해태 시절 해왔던 것들 가운데 어느 것은 맞고, 어느 것은 틀렸다는 것을 확인했다. 토론을 통해 ‘왜 이것을 하는가’와 원리를 배웠다. ‘예감, 직감, 노림수가 좋은 선수가 진짜 좋은 포수’라고 노무라는 말했다.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동안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잘못 알려준 것이 후회도 된다. 그래서 더욱 미안하다.” 누군가는 말했다. 인간은 후회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라고.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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