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 쿠팩스.스포츠동아DB
늦은 야구입문 공포의 파이어볼러
들쭉날쭉 제구력에 초창기 고전
1961년부터 퍼펙트 게임 등 두각
세번의 사이영상…6년간 ML 지배
36세때 최연소 명예의 전당 헌액
지난 스프링캠프서 류현진과 만남
커브 그립 시범 등 남다른 애정도
4월 2일(한국시간) 다저스타디움에선 5만3000여 만원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2013시즌 개막전이 열렸다.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마치고 새로 단장한 다저스타디움은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있었다. 누가 개막전 시구를 할지 극비에 부쳐진 가운데 미국프로농구(NBA)의 전설 매직 존슨이 마운드로 향했다. 공동 구단주이자, 1980년대 LA 레이커스의 쇼타임을 이끌었던 그였기에 팬들은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마운드에 선 존슨이 공을 던지려는 순간, 돈 매팅리 다저스 감독이 갑자기 마운드로 향하더니 투수교체 사인을 냈다. 물론 연출된 장면이지만, 개막전에서 시구자가 감독에 의해 바뀐 최초의 ‘사건’이었다. 천천히 마운드로 걸어온 시구자는 바로 ‘황금의 왼팔’ 샌디 쿠팩스(78)였다. 지난 스프링캠프에서 쿠팩스는 한국에서 온 좌완투수 류현진에게 직접 커브 그립을 시범보이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36세 20일)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쿠팩스의 가르침은 어쩌면 류현진에게 잊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LA 다저스 류현진(오른쪽)은 애리조나 스프링캠프 당시 자신의 트위터에 샌디 쿠팩스와 악수를 나누는 사진을 올렸다. 사진 출처|류현진 트위터
○제구력 들쭉날쭉한 좌완 파이어볼러
유태인인 쿠팩스는 1935년 12월 30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는 야구보다 농구에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신시내티대학에서 농구선수로 뛴 그는 2학년에 올라가서야 야구팀에 합류했다. 31이닝을 던져 3승1패를 기록하면서 30개의 볼넷을 허용했지만, 불같은 강속구를 앞세워 무려 51개의 삼진을 잡아내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끌었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테스트하던 도중 그의 공을 받던 샘 내런 불펜코치의 손가락이 부러진 사실은 유명한 일화다. 뉴욕 자이언츠와 파이어리츠를 따돌리고 그를 차지한 팀은 브루클린 다저스였다. 연봉 6000달러에 당시로는 파격적인 2만4000달러의 사이닝 보너스가 책정됐다. 최소 2년 동안 마이너리그로 강등시키지 않는다는 조건까지 추가됐다. 신인 쿠팩스의 메이저리그 직행으로 졸지에 마이너리그로 강등된 희생양은 좌완투수 토미 라소다였다.
제구력이 다듬어지지 않은 쿠팩스의 빅리그 초창기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데뷔전은 1955년 6월 25일 밀워키 브루어스전이었는데, 1-7로 다저스가 뒤진 상황에서 등판해 행크 애런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허용하는 등 2사 만루 위기를 맞았다가 삼진으로 간신히 모면했다. 7월 7일 처음 선발 등판한 경기에선 4.2이닝 동안 볼넷을 8개나 허용해 2개월 가까이 불펜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감격의 첫 승은 8월 28일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2안타 완봉승으로 장식했다. 볼은 빨랐지만 제구력이 전혀 나아지지 않은 1956년에도 58.2이닝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삼진 30개를 잡는 동안 볼넷을 29개나 내주며 방어율은 4.91이나 됐다. 1957년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근 2년 만에 완투승을 거두기도 했지만, 선발 로테이션을 확고히 차지하지는 못했다. 9월 30일 LA로 연고를 옮기기 직전 브루클린에서 치른 역사적인 마지막 경기에서도 그는 구원투수로 나와 경기를 마무리했다. 1958년 11승11패1세이브(방어율 4.48), 1959년 8승6패2세이브(방어율 4.05)를 기록한 쿠팩스는 1960년 초 버지 바바시 단장과 면담을 갖고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충분한 출전 기회를 보장받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해 8승13패1세이브(방어율 3.91)에 그치자 그는 심각하게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다.
○‘황금의 왼팔’이 지배한 6년
쿠팩스의 진가는 1961년부터 드러났다. 딱 1년만 더 뛰어보고 안 되면 은퇴하겠다는 배수진을 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운동에 전념했다. 그 결과 18승13패1세이브에 무려 269개의 삼진을 잡아내 크리스티 매튜슨이 58년간 보유하고 있던 내셔널리그 한 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을 바꿔놓았다. 1962년 다저스는 좌측 펜스까지 거리가 250피트(약 76.2m)에 불과한 콜리시움을 떠나 투수친화적인 다저스타디움으로 홈구장을 옮겼다. 그 덕분에 1961년 3.52였던 쿠팩스의 방어율은 2.54로 뚝 떨어졌다. 7월 1일 신생팀 뉴욕 메츠전에선 생애 첫 노히트노런을 작성했는데, 특히 1회초 수비에서 공 9개 만으로 삼진 3개를 잡아내는 위력투를 과시했다.
메이저리그는 1963년 스트라이크존을 확대하는 중대한 변화를 단행했다. 그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볼넷이 전년에 비해 13%나 줄어든 반면 삼진은 6% 늘었다. 전체 타율은 0.261에서 0.254로, 득점은 15% 감소됐다. 가장 큰 수혜자 중 한명인 쿠팩스의 9이닝당 볼넷은 1.7개로 크게 줄어들었다. 5월 12일 막강 타선을 자랑하는 라이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전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등 쿠팩스는 완봉승 11번을 포함해 25승을 따냈고, 306개의 탈삼진과 방어율 1.88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내셔널리그 최우수선수(MVP)에 이어 만장일치로 사이영상을 거머쥐었고, 뉴욕 양키스를 4경기 만에 물리친 뒤에는 월드시리즈 MVP도 그의 차지였다. 당시 양키스의 주전 포수 요기 베라는 “정규시즌에서 어떻게 25승이나 따냈는지 이해가 되지만, 왜 5패나 당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을 정도로 쿠팩스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좌완으로 우뚝 섰다. 큰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시작한 1964년 쿠팩스는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생애 3번째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지만 잦은 부상에 시달렸다. 삼진 13개를 잡으며 19번째 승리를 따낸 뒤에는 팔을 똑바로 펼 수 없어 팀 닥터의 권유로 시즌을 조기에 마감했다. 1965년 팔꿈치 통증에도 불구하고 쿠팩스는 무려 335.2이닝이나 소화했다. 9월 10일 컵스의 봅 헨들리와 팽팽한 투수전을 펼친 끝에 자신의 4번째 노히트노런을 퍼펙트게임으로 작성한 쿠팩스는 26승8패, 382탈삼진, 방어율 2.04로 생애 2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또 다시 만장일치로 사이영상의 주인공이 됐다. 미네소타 트윈스와 대결한 월드시리즈 1차전을 앞두고 그는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 됐다. 유태인 최대 명절인 욤키퍼를 지키기 위해 등판을 사양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 2차전에서 패전을 당한 쿠팩스는 2승2패로 맞선 5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둬 자존심을 회복했다. 불과 이틀 휴식을 취한 뒤 마운드에 오른 7차전에서도 3안타 완봉승을 거두며 월드시리즈 MVP를 품에 안았다. 팀 닥터의 은퇴 권유를 받으며 맞이한 1966년 쿠팩스는 41경기에 선발 등판해 323이닝을 던져 27승9패, 방어율 1.73의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자신의 마지막 시즌에서 쿠팩스는 통산 3번째로 만장일치 사이영상을 받는 금자탑을 쌓았다.
○영원한 다저스의 전설
은퇴 후 6년 만인 1972년 쿠팩스는 명예의 전당에 최연소 멤버로 입회했고, 그 해 6월 5일 그의 등번호 32번은 로이 캄페넬라(39번), 재키 로빈슨(42번)의 배번과 함께 다저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통산 165승87패9세이브, 2396탈삼진, 방어율 2.76을 기록한 그는 선발 등판한 314경기에서 137번 완투했고, 40차례 완봉승을 거둔 철완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선수생활과는 달리 은퇴 후에는 2차례 이혼했고,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나는 등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1979년부터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 투수코치를 지내다 라소다 감독과 불화가 불거진 1990년 사임하기도 했다. 올해 1월 마크 월터 회장의 특별자문을 맡아 다시 다저스와 인연을 맺은 쿠팩스는 시즌 중에도 투수진들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류현진과의 다음 만남에서 쿠팩스가 어떤 말을 전할지 궁금하다.
스포츠동아 미국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