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CAFE] 0.05mm펜촉으로 50만회…한국 건축의 웅장함 그대로 재현

입력 2014-01-0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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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mm의 가는 펜으로 전통건축, 성벽, 기왓장, 소나무 등을 그려 온 ‘기록펜화’의 대가 김영택 화백. 그의 작품은 사진처럼 정교하면서도 살아 숨쉬는 듯, 날아오르는 듯한 생명감으로 가득하다.

■ ‘펜화, 한국 건축의 혼을 담다’ 펴낸 김영택 화백

전국 돌며 건축물 펜화 기록…세밀화 대가
작품 하나에 한달쯤…펜선 약 50만번 그어
훼손된 건축물도 자료를 통해 최대한 복원
펜화 91점 모아 책 발간…영문판 발간 추진
“한국 건축 아름다움 세계와 공유하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가는 펜촉의 굵기가 0.1mm인데 사포로 갈면 약 0.03mm가 됩니다. 숙달되면 이 펜촉으로 1mm안에 선 5개를 그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세밀한 기법을 한껏 발휘하여 진천 보탑사 3층목탑을 그렸습니다. 완성하는 데 한 달이 걸렸습니다.”

‘기록펜화’의 대가 김영택(69) 화백은 0.05mm의 가는 펜으로 작품을 그리는 한국 세밀화의 리더이다. 그가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그린 전통 건축, 성벽, 기왓장, 소나무 등의 그림은 마치 사진처럼 정교하면서도 따뜻한가하면 살아 숨쉬듯, 날아오르는 듯 생명감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사진을 찍은 뒤 포토샵을 이용해 그린 것이 아니냐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점을 찾으려 하지만 이내 “와!”라는 감탄사를 내뱉고 만다.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펜화에 두 손을 들기 일쑤다.

그는 도대체 이런 펜화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을까.

홍익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김 화백은 원래 유명 디자이너였다.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심사위원을 지냈고 1993년엔 국제상표센터가 전 세계 그래픽 디자이너 중 탁월한 업적을 쌓은 톱 디자이너 54명에게 수여하는 ‘디자인 엠베서더(DESIGN AMBASSADOR)’에 우리나라 최초로 뽑히기도 했다.

그가 펜화가로 변신하게 된 것은 지난 1994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갔다가 그곳 기념물의 절반 정도가 펜화라는 것을 발견하고, 서양인의 눈에 익숙한 펜화를 통해 우리 문화재를 알리고 싶어서 펜화에 빠져들었다. 그 후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전통 건축물을 펜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 전통 문화재는 물론 로마 콜로세움, 영국의 세인트폴 대성당 등 세계의 문화재도 펜으로 담아냈다. 30여 년간 이런 문화재를 펜화에 옮긴 것만도 250여 점에 달한다.

눈물 날 정도로 세밀한 펜화. 그는 펜화 한 장 그리는데 펜 선을 몇 번이나 그을까.

“사실 나도 궁금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대략 계산해 보았습니다. 1초에 3∼4회 긋는 선을 시간과 날짜로 곱한 수에 휴식시간을 빼고 보니 대략 50만번이 되더군요. 이 정도의 노력이니 단순히 오리지널 건축물을 모사하는 것을 넘어서, 그 건물의 혼을 담는다는 표현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우직하고 세밀한 그답다. 50만번의 선을 그어야만 하나의 작품이 탄생했다고 하니 그림을 넘어 도(道)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우리 전통건축의 복원도 김 화백의 손과 머리를 통하면 완벽하게 재현된다. 사실 우리 전통건축은 대개 목조건축으로 화재나 전란 등으로 훼손됐거나 복원됐더라도 과거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 경우가 많다. 김 화백은 상당수의 그림을 자료조사를 통해 건물 원래의 모습을 최대한 복원했다. 이를테면 건물 주변에 다른 건물이 들어서거나 나무 등이 가리고 있는 경우 사료와 그의 상상력으로 원래 건물의 특징을 최대한 보여줬다. 이는 사진으로는 할 수 없는 그림만이 갖는 최대 장점이다.

김영택 화백이 그린 충북 진천군 보탑사 3층 목탑. 황룡사 9층 목탑을 모델로 만든 탑으로 유명하다.


김 화백은 펜화를 그리면서 ‘김영택 원근법’이라는 자신만의 기법을 개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영택 원근법’은 거리에 따라 크기의 비례가 일정한 서양 원근법과는 달리 인상적인 대상을 더 또렷하고 두드러지게 인식하는 인간 시각에 맞춘 원근법이다. ‘김영택 원근법’을 적용해 탄생한 펜화는 피사체를 현장에서 직접 보는 것과 같은 감흥을 전달할 수 있다. 여기에 정교하고 세밀한 펜화의 특성이 어울려 사진보다 더 훌륭하게 전통 건축이 재현됐다.

김 화백이 생각하는 우리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은 뭘까. 그는 펜화에 무엇을 담는 것일까.

“제가 펜화에 담고 싶어 하는 우리 건축의 아름다움은 세상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무아의 아름다움’이며, 세계 건축이 추구해야 할 ‘자연이 우선하는 건축’입니다. 펜화는 감성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인 그림입니다만 솔직하고 정확하며 세밀하게 우리 건물의 특성을 그대로 옮겨 담을 수 있습니다. 건축도면처럼 그리는 서구인들의 펜화 기법이 아닌, 제 나름의 펜화 기법을 하나하나 터득하여 ‘한국적 펜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김 화백의 펜화를 보면 ‘조선백자의 향기가 난다’거나 ‘한국화 같다’라고 표현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 화백은 최근 한국 전통 건축물을 그린 펜화 91점을 모아 ‘펜화, 한국 건축의 혼을 담다’(서울셀렉션 펴냄)를 출간했다. 30년간 건축 문화재를 그린 김 화백의 역작인 셈. 그동안 몇몇 매체와 에세이를 통해 소개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많은 작품이 한 권에 수록돼 도록 형태로 출간되긴 처음이다. 광화문 근정전 다보탑 등 전통 건축물이 총망라됐다. 백문이불여일견! 도록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넘어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김 화백은 “그림의 소재는 한국의 자연과 건축이지만 그 속에는 어느 문화권의 사람과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자랑도 하고, 함께 보고, 느끼고, 즐기고, 배우게 하고 싶습니다”라며 이 도록을 영문판으로 만들어 세계인들에게도 소개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연제호 기자 sol@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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