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눈과 얼음의 세상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세 번의 ‘오르가즘’을 느끼게 하는 참 ‘야한 책’
이 책, 참 묘하다. 애인처럼 자꾸 보고 싶어진다. 자꾸 펼치게 만든다. 적어도 세 번은 ‘오르가즘’을 주는 참 ‘야한’ 책이다.
첫 번째 오르가즘은 보는 즐거움이다. 시원하고 거대하고 위대한 히말라야의 속살까지 거침없이 보여준다. 마치 책을 뚫고 나올 듯한 기세의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콘크리트에 갇혀있던 좀생이 가슴이 뻥 뚫린다. 새하얀 만년설이 된다. 두 번째 오르가즘은 읽는 즐거움이다. ‘쭉쭉빵빵’ 잘빠진 새댁 같은 글 때문이 아니다. 립스틱 짙게 바른 ‘농익은 여인’같은 글 때문만은 더더욱 아니다.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담백하고 솔직하고 때론 투박한 시골 여인네 같은 글 때문이다. 꾸밈보다는 날것 그대로, 화려함보다는 단순한 필치로 가슴을 뛰게 한다. 마지막 오르가즘은 울림과 느낌이다. 소박하게 그러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히말라야 사람들의 이야기는 큰 울림을 준다. 가진 게 적다고, 남들보다 이룬 게 작다고 가슴에 ‘숯불’을 품고 사는 우리들에게 하심(下心)의 깨달음을 준다.
석양이 홀왈링히말의 하얀 설산을 붉게 물들였다.
●히말라야 2400km 종주의 대기록…그곳엔 사람의 향기가 있다
책 ‘히말라야, 길을 묻다’(글·사진 이훈구 l 워크컴퍼니 펴냄)가 바로 그 책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의 땅’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이 책의 정체를 설명하기는 녹록치 않다.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저자가 180일간 파키스탄, 인도, 네팔 3개국 히말라야 2400km를 종주한 뒤 집필했으니 여행서 쯤 된다. 아니 여행 중 찍은 사진이 300여 장이나 되고 사진이 주를 이루는 사진집 쯤 될 것이다. 책 제목에서 이미 밝혔듯이 히말라야를 걷고 그 속에서 삶의 ‘길을 묻는’ 책이니 힐링서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힌두쿠시 산맥의 독특한 지형. 거친 땅에서도 농사를 짓고 있다.
●낮엔 걷고 밤엔 발전기를 돌리며 기록…참 대단한 기자
저자는 이훈구 기자다. 현직 메이저 일간신문 사진기자다. 20년 넘게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빈 베테랑이다. 그가 히말라야로 긴 취재를 갔다. 2011년 8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니까 장장 6개월이라는 긴 취재다. 박정헌 대장이 이끄는 패러글라이딩원정대를 동행 취재한 것이다. 낮엔 원정대와 함께 걷고 뛰고 오르고 기며 셔터를 눌렀고 밤엔 낮에 찍은 사진과 메모를 정리하느라 서너 시간밖에 못 잤단다. 산속에서 발전기를 돌려가면서 텐트 안에 웅크리고 앉아 컴퓨터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산물이 바로 이 책이다.
레로 가는 고갯길은 기기묘묘한 지형의 연속이다. 마치 화성이나 달 표면 같다.
●인문학적 소양이 깊게 깃든 여행서…300여 장의 사진이 파노라마로
함께 ‘히말라야, 길을 묻다’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이 책은 여는 여행기와는 차이점이 많다. ‘어디 어디를 다녀봤더니 좋더라. 당신들은 여기 못가봤지롱!’ 형식의 여행서와는 뿌리부터 다르다. 저자의 인문학적인 소양이 깊이 관여됐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다. 글 전개에 앞서 히말라야 3국(파키스탄, 네팔, 인도)의 문화와 현재 정치 사회상황 등을 다룬 인트로 페이지를 마련했다. 이를테면 이렇다. 1챕터인 ‘파키스탄 히말라야’ 편에서는 원주민들의 삶과 포터들의 일상을 소개했다. ‘인도 히말라야’ 편에서는 불교, 힌두교, 시크교의 고향과 히말라야 사람들의 생활을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 3챕터인 ‘네팔 히말라야’편에서는 롤왈링히말과 쿰부히말의 여정, 그리고 여행길에서 만난 산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또 히말라야 3개국의 국제정치 상황까지 곁들여 맛있는 히말라야 비빔밥을 만들었다.
롤왈링히말에서 콤부히말로 넘어가는 마을 타메에서 만난 어린이들.
●친절한 인덱스…한 눈에 보는 인덱스의 즐거움
여기에 친절하게 말미에 인덱스를 첨부했다. 일종의 보너스인 셈이다. 2400km의 여정을 쉽게 정리할 수 있도록 사진과 함께, 본문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6페이지에 걸쳐 축약본을 만들었다. 인덱스만 봐도 저자가 다녀 온 길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의 포커스는 결국 사람이다. 산과 함께, 히말라야의 품속에서 욕심 없이, 자족하며 살아가는 우리 지구촌 이웃들의 이야기다. ‘눈과 얼음의 나라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시미가운 마을 고갯마루에서 바라본 가우리상카르 봉우리가 석양이 물들어 있다.
●“이 기록물이 영원히 정지된 스틸 컷으로 남았으면”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히말라야, 길을 묻다’를 본 고수들은 기립박수를 잃지 않는다. 산악인 엄홍길 씨는 “히말라야 2400km는 유랑길이 아닙니다. 고통과 인고의 긴 여정입니다. 추위와 고산증, 외로움의 연속”이라며 “산을 따라가는 여정 중에 만나고 느낀 이야기 외에, 파키스탄 북부 산중의 칼라시족 생활과 풍습, 와가보더의 국기하강식 풍경, 간다라 예술의 역사 등 시시콜콜 곰살맞게 전했다”며 저자의 독특하고 따뜻한 시선에 박수를 보냈다.
히말라야 여정을 함께 했던 산악인 박정헌 대장은 “히말라야 횡단 180일 동안의 기록은 한 기자의 동행취재기가 아닌 어쩌면 두려움과 고통의 길 위에서 수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름다운 인고의 시간’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우리는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마침내 까마득히 높고 황량한 히말라야 오지의 세상을 문명세계에 드러낼 수 있었다. 이 기록물들이 영원히 정지된 스틸 컷으로 세상에 머물러 주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책꽂이에 꽂아 두고 두고두고 보고 싶다
이 책의 깔끔한 편집도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하드커버의 단단함과 깔끔함은 히말라야 산정을 닮았고 시원하게 편집된 내지에선 사람향기가 폴폴 나온다. 편집의 승리다. 2만8000원이라는 책값은 아깝지 않다. 이 돈을 내고 히말라야 구석구석의 사람과 문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차라리 행복이다. 책꽂이에 꽂아 놓고 두고두고 보고 싶은 책이다.
연제호 기자 sol@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