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은 안타까웠지만 홍명보의 ‘태극마크 24년’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스페인과의 2002한일월드컵 8강전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킥을 성공시킨 뒤 환하게 웃으며 달리고 있다. 스포츠동아DB
걸음걸음이 한국축구의 찬란한 역사였다. 한 시절을 풍미한 위대한 선수였고, 한때 최고 지도자로 촉망받았다. 아시아 최고의 축구스타로 존경 받은 그는 영웅이었고, 레전드였다. 비록 2014브라질월드컵 실패(1무2패·조별리그 탈락)의 책임을 지고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는 과정에서 ‘부동산 매입’ 논란과 ‘부적절한 선수단 회식 영상’ 유출 등 일련의 구설이 이어졌지만 홍명보(45) 감독이 남긴 발자취와 업적을 모조리 잊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사퇴를 알리는 자리에 선 홍 감독의 표정에선 서운함 대신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 어깨를 짓눌러온 부담스러운 짐을 내려놓은 듯 시종 밝고 유쾌하게 기자회견을 이끌었다. “1990년(2월 4일 노르웨이 평가전) 선수를 시작으로 코치, 감독까지 24년여의 시간을 (국가대표로) 보냈다. 오늘(10일)로 이 자리(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나지만 앞으로 더 발전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태극마크를 달고 지내온 24년 동안 때론 역경과 시련도 있었지만, 주저앉은 적은 없었다. ‘사퇴’가 핵심이었던 어려운 자리에서 나온 민감한 질문에 “난 그렇게 비겁하게 살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스스로의 삶과 과정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대학생(고려대) 신분으로 출전한 1990이탈리아월드컵부터 2002한일월드컵까지 아시아선수 최초로 역대 4차례 월드컵 무대에 도전했다. 1994미국월드컵 조별리그 스페인과의 1차전에선 만회골에 이어 서정원의 동점골을 도왔고, 독일과의 3차전에선 중거리 슛으로 추격골을 터뜨렸다. 최고 하이라이트는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한 2002한일월드컵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서서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4강을 이끈 뒤 두 팔을 크게 벌린 채 달리던 모습은 여전히 축구팬들의 뇌리에 생생한 명장면이다.
지도자 홍명보의 인생은 ‘논란→영웅→역적’의 순으로 이어졌다. 2006독일월드컵에 나선 딕 아드보카트 감독 체제의 국내 코치로 발탁돼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도자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지 않던 시점이라 “홍명보이기에 무자격자임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코치로 기용됐다”는 요지의 특혜시비가 일기도 했다. 핌 베어벡 감독과 함께 한 2007아시안컵 때는 일본과의 3·4위전에서 판정에 불만을 표하다 퇴장을 당하기도 했다.
지도자로서 영광의 출발점은 2009년이었다. U-20(20세 이하) 대표팀 감독으로 국제축구연맹(FIFA) 이집트 U-20 월드컵에 출전해 8강에 올랐다. 현 대표팀의 중추인 한국판 ‘골든 제너레이션(황금세대)’의 시작이기도 했다. 2010광저우아시안게임에선 아쉽게 3위에 그쳤지만, 2012런던올림픽 동메달로 한국축구사를 새로 썼다. 2013년 6개월간 전 스승 거스 히딩크 감독을 도와 안지 마하치칼라(러시아)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로 활동한 뒤 최강희 감독(현 전북현대)의 뒤를 이어 대표팀 사령탑에 올랐지만, 큰 꿈을 꾸고 도전장을 내민 브라질월드컵에서 깊은 상처를 안았다. 홍 감독은 “앞으로 엄청난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을 일이 없으니 (사퇴하는) 오늘은 좀더 많이 받고 자리를 뜨겠다”며 사실상 ‘감독 홍명보’의 마지막을 알렸다.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yoshike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