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 사진|JYP엔터테인먼트
‘어른이’라는 말이 있다. 어른과 어린이를 합성한 신조어로 몸은 어른이지만 생각이나 행동은 여전히 어린이 같은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하곤 한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박진영과의 대화는 그가 확실히 ‘어른이’라고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다만 어른이는 어른이지만 박진영에게 한해서만은 ‘어른이’의 정의를 조금 달리할 필요가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없이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어린이의 모습을 보이다가도 명확한 비전과 철학을 지닌 어른의 모습을 보이는 박진영은 충분히 본받을만한 성숙한 생각과 순수하게 즐길 줄 아는 열정을 지닌 ‘어른이’였다.
사실 박진영은 이런 양면적인 모습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날 인터뷰의 당초 목적은 화제의 앨범 ‘어머님이 누구니’에 대한 것이었지만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를 털어놓는 박진영의 모습은 오해와 편견은 말 그대로 오해와 편견일 뿐이란 것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 ‘어린이’ 박진영
박진영, 사진|JYP엔터테인먼트
십년을 사귀어도 알 수 없는 사람의 속을 한 두 시간의 대화만으로, 거기다 사석도 아닌 인터뷰자리에서 보이는 모습은 극히 일부분의 단면에 불과하겠지만, 이 대화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박진영은 상당히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실제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매번 말을 할 때 마다 그 안에 포함된 기쁨과 슬픔, 즐거움 등의 감정을 정제하지 않고 그대로 표현하고 표출시키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감정의 표출은 다시 그의 음악적 자양분으로 바뀌어 ‘박진영표 노래’들이 탄생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박진영은 “내가 지금까지 500곡 정도를 만들었는데, 비율로 보면 야한 곡이 적다. 100곡도 안되는 것 같다(사실 500곡 중 100곡이 적다는 것에는 아직도 동의하기 힘들다)”라며 “슬플 때 슬픈 거 만들고 야할 때 야한 거 만드는 식이다. 정말 내 직업이 축복받은 직업인 것 같다. 축복받은 직업을 즐겨야하는데 머리를 쓰고 일로 하면 힘들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모든 노래를 그때 기분으로 쓴다. 또 모든 곡이 정확하게 다 실제 생활과 연결되고, 그게 이 직업을 할 수 있는 힘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감정의 기복이 크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 같은 감정의 기복을 대중들이 가장 잘 확인 할 수 있던 곳이 바로 SBS ‘K팝스타’였다.
일반적으로 가혹한 심사평이나 독설로 화제를 모으는 경우가 많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박진영은 반대로 ‘과도한 칭찬’으로 논란을 빚은 희귀한 케이스로, 이에 대해 박진영은 “감정의 기복이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20년 동안 500곡 썼다고 하면 미쳤다고 한다. 대충 한달에 두 곡씩 쓴 꼴인데, 감정기복이 커서 그렇다”라며 “(K팝스타의 심사평은)그냥 감정을 느낀 그대로를 말해서 그렇다. 마음이 과장된 거지 표현이 과장되진 않았다. 그런데 보통 어른이 되면 감정이 정화가 돼서 표현하는데 나는 그런 필터링이 좀 두렵다”라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종종 이런 필터링이 필요한 경우도 분명 존재하며, 여기에 박진영이 내놓은 해결책 역시 재미있다.
박진영은 “필터링을 안 하는 대신 필터링 할 필요도 없이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 조심하지 않고 말을 해도 틀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마치 공자가 말한 종심(從心,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종심소욕 불유구 - 從心所欲 不踰矩 -를 줄인 말로 보통 70세를 뜻한다)과 비슷한 경지를 언급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박진영의 어린이 같은 순수함은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그 방점을 찍었다.
앞으로 또 연기를 할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박진영은 “연기도 (이미)했다. 곧 그 작품이 나올 거다. 재밌는 거면 무조건 할 거다. 난 재밌으면 무조건 다 한다”라고 본인의 재미가 1순위임을 확실히 알렸다.
하지만 ‘5백만불의 사나이2’를 찍을 생각이 있냐고 묻자 그는 “아마 그건 제안이 안 올 거다”라고 물러나 웃음을 자아냈다.
○ ‘어른’ 박진영
박진영, 사진|JYP엔터테인먼트
그렇다고 박진영이 자신의 기분에 따라 멋대로 일을 처리하는 어리숙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박진영은 누구보다 확고한 기준을 세우고 철두철미하게 비즈니스를 펼치는 인물로 유명하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근 3년간 JYP엔터테인먼트에서 벌어진 변화와, 앞으로 3년간 이뤄나갈 청사진이다.
최근 미쓰에이와 박진영의 연이은 히트로 전세를 회복했다고는 하지만 최근 수년간 보여준 JYP의 모습은 국내 3대 기획사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JYP의 이 같은 부진의 원인으로는 과도하게 박진영에게만 집중된 시스템이 지적되곤 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하는 방식은 효율성면에서도 그렇고 음악적 스타일에 식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박진영은 “3년 전에 별의 별짓을 다 하는데도 회사 시가 총액이 1조원을 못 넘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지금의 시스템으론 절대 넘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라며 “미국 진출을 시도하면서 딱한 얻은 건 유니버설이나 워너브라더스같은 대형 유통사의 구조를 이해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해야 대량 생산이 가능한지 체계를 몸으로 알게 됐다. 이후 2012년부터 ‘박진영이 없는 회사로 만들자. 내가 아예 없다고 생각하고 해보자’라고 결심했다”라고 입을 열었다.
이어 “내가 다 결정을 내리던 시스템에서 알아서 하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직원이 당황했다. 여러 시행착오도 있고 실패도 있었지만 나는 시스템을 바꾸는 일을 계속했다. 시스템과 크리에이티브란 말이 어울리지도 않고 둘을 합하는 게 어려운 일이지만 크리에이티브를 시스템화 시키는 노력을 했다. 3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이제 좀 만들어진 것 같다”라고 자신이 없는 JYP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또한 박진영은 “그사이 30명의 작곡가를 뽑아서 키우고 있었고, 외부 작곡가에게도 곡을 맡겼다. 그렇게 나없는 의사결정이 좋은 결과를 낸 게 올해다. 올해 이 시스템을 통해 발표한 곡들이 거의 예상과 맞아 떨어졌다”라며 “다음은 레이블을 만드는 게 목표다 3년간 서브레이블을 만들어 아이돌을 운영해봤는데, 아이돌은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서 위험하더라. 뮤지션 위주로 만들어야겠다는 판단에 스튜디오 제이라는 레이블을 만들고 지소울과 15&를 소속시켰다.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유니버설이나 워너처럼 JYP라는 본사아래 수십개의 레이블이 운영되고 유통되는 구조를 만들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같은 미국식 레이블 시스템을 100% 카피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박진영은 “미국 시장의 단점은 신인가수를 발굴하고 육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큰 차이다. 신인의 발굴과 육성은 K-POP의 큰 장점으로 점점 더 많이 투자하되 레이블 시스템을 발전시키려고 한다”라고 구상을 밝혔다.
박진영은 “스티브 잡스가 죽고 애플의 주가가 반토막 나는 걸 보고 내가 죽고 없어도 잘될 회사를 구현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아마 그 당시에 (업계)1, 2위를 다투고 있었으면 오히려 못했겠지만 뒤쳐져있으니 시도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는데 또 3년 정도는 걸릴 것 같다”라고 3년 후 그리고 그 이후 먼 미래의 청사진까지 치밀하게 구상하는 철저함을 보여주었다.
○ ‘어른이’ 박진영
박진영, 사진|JYP엔터테인먼트
‘대표 박진영’의 목표는 자신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회사의 기반을 닦아 놓는 것이지만 ‘가수 박진영’의 목표는 60세가 됐을 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춤과 노래를 잘하는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박진영은 “요즘 회사 직원들이 기 살아있고 기뻐하는 것이 제일 즐겁다. 또 우리 팬들이 기뻐하는 게 즐겁다”며 “60살 때 가장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20대의 체력과 근력, 순발력을 유지하기 위해 숨 막히게 꽉 짜인 생활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지난 2년간 인체에 대한 생물학과 의학공부를 했다”라고 밝혔다.
이어 “그리고 신체를 회복시키고 유지시키는 삶을 2년 반 동안 하니 잔병치레도 없고 주름까지 펴질정도로 말도 안되는 변화가 일어났다”며 “실제 지금 내가 춤을 추며 노래하는 모습을 확인해봐라. 20대 때 보다 숨도 더 고르고 춤도 더 안정적이다”라고 치열한 몸 관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렸다.
하지만 신체의 젊음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고행이라고 할 정도로 굉장한 노력과 근성을 필요로 하는 건 당연한 일로 박진영 역시 “60살까지 이렇게 살 생각을 하니 숨이 막힌다”라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이처럼 스스로 고통의 길을 자초한 이유에 대해 박진영은 “팬들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내가 힘들어도 이렇게 살기로 결심을 했다. 팬들이 사회인이 되고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도 있는데 자신이 힘든데도 나를 응원해준다. 그나마 보답하고 위로해줄 수 있는 방법이 내가 더 힘들게 살아서, 그 응원을 당연하게 즐긴 게 아니라 고마워했다는 걸 팬들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그게 내 일이다”라고 고통스러운 목표를 자신에게 계속 부과하는 이유를 밝혔다.
더불어 “어른들이 반드시 반칙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젊은이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편법 안 쓰고 사는 어른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라고 타의 모범이 되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다.
박진영은 “기성세대들이 다 반칙 하는걸 보면 허탈하지 않나. 모든 분야가 어떻게 해야 내 자리를 지킬까 그것만 궁리한다. 어렸을 때는 재미있고 신인이 잘되는 그런 세상을 꿈꿨을 건데 (권력이 생기면)다들 너무 자기 유리한 것만 생각한다. 바늘 들어갈 틈도 없다. 어떻게든 게임의 룰을 공정하게 만드는 일을 후배들을 위해 하고 싶은데 계란으로 바위치기보다 더 힘들다”라고 가요계의 현실을 꼬집었다.
이 같은 일침은 비단 가요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박진영은 “80년대 이후로 100대 기업에 새롭게 포함된 기업의 수가 전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제일 적을 것이다. 새로운 뭔가가 탄생하는 걸 너무 힘들게 해뒀다”라고 후손이 아닌 기성세대만을 위해 구축된 현재 한국의 시스템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끝으로 그는 “힘을 더 기를 때까지 나라도 열심히 하자. 반칙하지 말자. 이 맥 빠지는 세상에 뭔가 위안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조금 더 괴롭게 살아서 위안이 된다면 나는 괜찮을 것 같다”라고 자초한 고생길에 담긴 진짜 의미를 밝혔다.
동아닷컴 최현정 기자 gagnrad@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