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베이스볼] ‘야구장의 포청천’ 임채섭 “심판은 자부심으로 산다”

입력 2015-08-19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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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임채섭 심판. 스포츠동아DB

■ KBO 사상 첫 2500경기 출장 임채섭 심판

1999년 삼성-롯데 PO 역사적 경기 주심
판정 미스로 승패 바뀌면 며칠간 잠 못자
비디오 판독 도입되면서 관중 비난 줄어


야구 심판은 1879년 내셔널리그에서 탄생했다. 1890년 처음으로 ‘미스터 엄파이어’라고 부르기로 했지만, 관중은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저 심판을 죽여라”고 외쳤다. 선수, 관중과 함께 프로야구를 구성하는 3대 요소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사랑받지 못하는 직업이 심판이다. KBO리그는 출범 34년째인 2015년 8월 1일 문학 LG-SK전에서 경사를 맞았다. 임채섭(52)
KBO 심판위원이 사상 최초로 2500경기 출장기록을 달성했다. 그 위대한 숫자 속에 담긴 스토리를 들어봤다.


● 휘문고-건국대 4번타자 출신의 짧은 프로선수생활


-프로선수 경력이 짧았다.

“1986년 OB 선수로 입단했다. 계약금 1500만원, 연봉 1300만원을 받았다.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 대우를 받았다. 당시 그 돈이면 서울에서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아버지와 돈을 모아서 빌라 한 채를 지었다. 1루수였는데, 같은 포지션에 신경식이 있어 입단하자마자 군대에 갔다. 방위를 마치고 와도 1군에서 뛰지 못했다. 나무 배트에 적응하지 못했다. 1988∼1989시즌 4경기 7타석에 들어선 뒤 프로선수생활을 접었다.”


-1990년 심판으로 입문한 계기는.

“1990년 쌍방울이 창단하면서 김인식 감독이 오라고 했다. 조건도 괜찮았다. 부모님도 선수생활을 원했는데, 심판을 택했다. 그해 프로선수 출신 3기 심판을 뽑았다. 150명이 응시했다. 합격자 3명 가운데 들었다. 김광철 당시 심판위원장이 ‘외모나 목소리가 천생 심판’이라고 했다. 집사람은 선수로서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봐서 그랬는지 심판을 권했다. 첫해 월급은 55만원으로 기억한다.”


● 2500경기 속에 숱한 사연을 담다!


-심판은 군기가 세기로 유명한데 빠르게 1군에 안착했다.

“때를 잘 만났다. 2군 심판 1년 만에 1군에 올라갔다. 선배들의 은퇴시기와 겹쳐 젊은 심판들이 많이 투입되던 때였다. ‘심판 잘 본다’는 선배들의 칭찬을 들었다. 그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심판을 할지 몰랐다. 요즘 2군에서 7∼8년씩 거친 뒤 1군에 올라오는 것에 비한다면 운이 좋았다. 오광소, 박찬황, 고 김동앙, 허운 선배가 같은 조였다. 한 시즌을 주기로 팀 구성원이 바뀐다. 지금도 그렇지만 심판의 규율은 해병대 못지않았다. 선배들의 모든 장비와 신발을 매일 닦아놓고 준비해야 했다. 이런 생활을 3년간 했다. 당시는 초임 심판도 주심을 봤다. 심판 첫 경기는 1991년 4월 5일 잠실구장의 태평양-LG전이었다. 3루심으로 출발했다.”


-욕을 많이 먹는 직업이라 힘들 텐데.

“초창기에는 TV 중계가 많지 않아서 간혹 실수가 있어도 잘 넘어갔다. 지금은 방송장비가 발달하고 모든 경기를 중계하기 때문에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인간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매일 매일이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바람에 스트레스가 심하다. 너그럽게 바라봐주고 동반자라는 생각을 해줬으면 한다.”


● 심판은 자부심으로 산다!


-2500경기를 치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인가.

“가장 기억나는 경기는 1999년 삼성-롯데의 플레이오프다. 1·7차전 주심을 봤다. 롯데 호세가 방망이를 던지고 난동을 부렸던 경기다. 2009년 KIA-SK의 한국시리즈 7차전 주심도 나였다. 나지완의 끝내기홈런이 나왔다. 프로야구의 역사적 경기에 주심을 봤다는 자부심으로 욕 먹고 힘든 때를 넘기며 여기까지 왔다. 심판은 자부심으로 산다.”


-비디오 판독까지 도입돼 더 힘들 것 같다.


“지금도 매일 경기가 끝나면 후회한다. 비디오 판독이 도입되면서 부정적 시선과 관중의 비난이 줄어든 걸 느낀다. 26년 심판생활 동안 슬럼프도 있었다. 40대 중반이 심판으로선 정점인 것 같다. 경기를 읽는 눈이 생기고 노련미가 있어 무리 없이 이끌어간다. 초년기보다는 감독, 선수들의 어필에 부드럽게 대처한다. 경험이 쌓이면서 감독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나오는지 미리 알게 되면 아무래도 부드러워진다.”


● 머릿속에는 온통 올바른 판정뿐!


-시즌 내내 바쁜 직업인데 어떻게 생활하나.

“1년 내내 같은 조와 전국을 돌아다닌다. 시즌에는 3개월간 하루 24시간 함께 먹고 자면서 지낸다.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다. 조원과 마음이 맞지 않으면 피곤해진다. 심판을 하면 그동안 같이 야구했던 동기, 동문들과 멀어진다. 관계가 끊어진다. 경기 도중 누구를 봐주고 할 여유도 없다. 동기도, 선후배도 없다. 올바른 판정뿐이다.”


-건강관리도 무척 중요할 것 같다.

“여름에 무거운 장비를 차고 경기장에서 몇 시간씩 서 있다보면 2∼3kg은 쉽게 빠진다. 경기 전에는 밥도 많이 먹지 않고 음료수도 안 마신다. 생리현상을 항상 조심한다. 7∼8월이 특히 힘들다. 심판은 체력이 버텨주지 못하면 힘든 직업이다. 겨울에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생리현상은 최대한 참는다. 파울팁에 부상도 잦다. 내 판정 미스로 중요한 경기의 승패가 뒤바뀌면 심판도 고통스럽다. 며칠간 잠도 못 잔다. 그 때가 심판을 그만두고플 때다.”

임채섭 심판위원(왼쪽 4번째)은 KBO리그 최초로 2500경기 출장 기록을 달성했다. 그는 심판생활을 시작한 뒤로 가족과 함께해본 시간이 많지 않다. 임 위원이 11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KBO 기념시상 때 처음 야구장을 찾은 자녀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 내 자식에게는 말리고 싶은 직업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클 듯하다.

“심판을 시작한 이후 아이들의 입학식, 졸업식에 가본 적이 없다. 여름휴가도 물론이다. 가족과 함께 했던 기억이 없다. 잘 자라준 아이들이 고마울 뿐이다. 그동안 심판은 자유소득자로 4대보험도 없었지만, 3년 전부터 근로자로 신분이 달라졌다. 심판복지를 위해 노력해주신 구본능 총재와 KBO에 감사한다. 만일 내 자식이 심판을 하겠다고 하면 절대로 시키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스트레스를 받는 자리다. 심판은 가족에게 죄를 짓고 사는 직업이다.”(11일 잠실구장에서 2500경기 출장을 기념하던 날 출가한 첫 딸과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들이 야구장에 온 유일한 날이다)


-가족은 뭐라고 하나.

“집에서도 심판의 습성이 나온다.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한다. 그 결정에 토를 달지 못하게 하고 말도 명령조다. 가족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심판의 가족은 경기장에 오지 않고 인터넷 댓글도 보지 않는다. 집에서 TV로만 경기를 본다. 경기 결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남편, 아버지가 어떤 판정을 내리는지, 잘하는지 못하는지 지켜본다. 그래서 심판은 가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으로부터 평가받는 힘든 직업이다.”


● 임채섭 심판이 기억하는 최고의 선수들


-기억에 남는 선수들은 누구인가.

“투수는 선동열이다. 스피드, 컨트롤 모두 최고였다. 타자는 장종훈이다. 매너가 좋았던 선수는 박진만, 선동열, 김진욱이다. 심판이 간혹 스트라이크를 놓치더라도 예민한 반응을 하지 않았다. 까칠했던 선수는 장채근, 김성한이다. 외국인선수로는 우즈, 브룸바, 데이비스, 가르시아가 기억난다. 언어 소통 때문에 오해가 더 커지기도 했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많다.

“정년이 만 57세다. 5년 남았다. 이번 시즌부터 경기수가 늘어 한 시즌에 100경기 가량 현장에 나간다. 예전에는 정규시즌과 포스트시즌까지 포함해 95경기 정도 뛰었다. 언제까지 심판을 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야구를 좋아하고 있다. 체력이 버텨주는 한 끝까지 해보겠다.”


● 임채섭 심판은?


▲출생=1963년 12월 25일(서울)

▲출신교=휘문고∼건국대

▲KBO 심판 입문=1990년 3월 1일

▲프로야구선수 경력=1988∼1989년 OB(4경기 7타석 7타수 무안타)

▲프로야구선수 데뷔전=1988년 9월 4일 사직 롯데전(더블헤더 제1경기·2타수 무안타)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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