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12 한국야구대표팀 김인식 감독. 스포츠동아DB
2009년 스타 빠진 전력으로도 준결승 위업
6년만에 다시 사령탑…빛나는 용병술 그대로
외롭고 힘든 여정이었다.
‘2015 WBSC(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 프리미어 12’에 출전한 야구대표팀 김인식(68) 감독은 그동안 ‘국민감독’이라는 호칭으로 통했다.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을 4강으로 이끌며 영광스러운 수식어를 얻었다. 당시 대표팀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만큼 화려했다. 박찬호 서재응 최희섭 이승엽 김병현 등 해외파들이 모두 모였고, 구대성 이종범 박진만 오승환 김태균 등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총출동했다.
태극전사들은 천문학적 몸값의 메이저리거들 사이에서 당찬 활약을 펼쳤다. 투수 활용과 대타 작전을 비롯한 김 감독의 용병술도 빛났다. 한국을 ‘한 수 아래’라고 평가하던 일본을 2번 연속 꺾었고, ‘세계 최강’이라며 뻐기던 미국도 격파했다. 준결승에서 일본을 다시 만나 아쉽게 패했지만, 늘 일본의 그늘에 가렸던 한국야구의 위력에 세계가 놀랐다.
그러나 2009년 제2회 WBC는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김 감독은 당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순조롭게 되는 게 없다”며 고개를 내젓곤 했다. 1회 대회 마무리투수로 활약했던 박찬호와 ‘붙박이 해결사’ 이승엽, 김동주가 모두 빠졌다. 김병현은 여권을 분실해 전지훈련에 합류하지 못했다. 주전 유격수였던 박진만도 부상을 안고 훈련지에 도착했다가 대회 직전 결국 하차했다. 박진만 대신 뛰어야 할 유격수 박기혁도 옆구리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추신수의 소속팀이던 클리블랜드에선 수비를 하지 않고 지명타자로 뛰어야 보내줄 수 있다는 조건까지 내걸었다.
상황이 이러니 제2회 WBC 대표팀이 ‘사무라이 재팬’에 맞서는 ‘거북선 코리아’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그 대표팀은 4강을 넘어 준우승까지 차지하면서 더 막강한 위력을 뽐냈다. 김 감독이 다시 한번 ‘국민감독’의 자리를 공고히 한 순간이었다.
김 감독은 그해 말 한화 사령탑에서 물러나면서 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이번 대회를 통해 6년 만에 다시 국가대표 지휘봉을 잡고 유니폼을 입었다. 시즌이 끝난 직후에 열리는 경기 일정 탓에 현역 감독들이 소속팀 지휘와 국가대표 사령탑을 병행하는 데 부담을 느끼면서 다시 김 감독에게 중책이 떨어졌다. 심지어 이번에도 선수 구성이 쉽지 않았다. 대표팀의 주축이 돼줘야 할 선수들이 부상이나 불미스러운 일로 연이어 하차했다.
역대 최약체 대표팀이라는 평가 속에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또 대회 기간 내내 주최국이나 다름없는 일본의 텃세 속에 일방적 불편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노(老) 감독은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꿋꿋하게 선수들을 하나로 묶었다. 김 감독이 오래도록 ‘국민감독’으로 남을 이유다.
배영은 기자 yeb@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