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니에리 감독. 사진= ⓒGettyimages멀티비츠
-라니에리 감독, 무명반란의 지휘자로 주가↑
-팬들도, 담당 취재진도 덩달아 어깨 ‘으쓱’
“그렇게 너희는 계속 싸워! 우리는 챔피언스리그에 갈 거야!”
런던 북서부의 소도시 왓포드의 비커리지로드에서 6일(한국시간) 펼쳐진 왓포드-레스터시티의 2015~2016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29라운드 경기. 주말 일제히 열린 정규리그에서 최후 승자는 레스터시티였다. 왓포드의 거센 반격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1-0으로 이겨 단독선두를 굳게 지켰기 때문이다. 바로 직전 벌어진 ‘북런던 더비’에서 토트넘과 아스널이 2-2로 비겨 격차까지 벌어져 기쁨은 두 배가 됐다. 시즌 종료까지 9경기씩을 남겨둔 가운데, 17승9무3패(승점 60)의 레스터시티가 계속 질주하고 있다. 2위 토트넘(승점 55), 3위 아스널(승점 52)의 추격권에서도 한 발 벗어났다.
적지에서 값진 승점 3을 딴 레스터시티 팬들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늦은 밤까지 비커리지로드 인근 펍에서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던 그들은 런던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도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기쁨을 만끽했다. 그저 목소리만 클 뿐 음정과 박자가 모두 엉성한 응원가 중 귀에 쏙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챔피언스리그!” 유럽 최정상 클럽들만 초대받는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출전이 성큼 다가왔으니, 레스터시티 팬들이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격세지감이다. 레스터시티는 불과 2년 전까지 챔피언십(2부리그)에서 치열한 생존싸움을 벌였고, 심지어 리그1(3부리그)에 머물기도 했던 무명 클럽이다. 오랜만에 승격한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또 다시 강등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반전 드라마를 연출했다. 풍족하지 못한 재정 형편상 이적시장에 많은 돈을 들일 수 없는 탓에 선수들이 많이 바뀐 것도 아닌데, 올 시즌 레스터시티는 꾸준히 성적을 내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이탈리아의 노장 클라우디오 라니에리(65) 감독을 모셔온 정도가 가장 큰 변화였다.
그런데 라니에리 감독의 영입마저 당초 계획에는 없었다. 레스터시티 몇몇 선수들이 지난해 여름 동남아시아 투어 도중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나이젤 피어슨 전 감독이 물러났고, 갑작스레 지휘봉을 잡았다. 당연히 새 시즌에 대비한 팀 훈련을 지휘하지도 못해 많은 우려를 샀다. 그러나 특유의 통솔력으로 팀을 똘똘 뭉치게 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강한 수비와 효율적 역습으로 승수를 쌓았다. 무명 선수들이 써내려가는 신데렐라 스토리, 놀라운 기적 속에 라니에리 감독은 뒤늦게 ‘명장’ 반열에 올라 차기 이탈리아대표팀 사령탑 유력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다.
단역에서 주연으로 바뀌자 팀 분위기도 크게 달라졌다. 레스터시티 구성원 모두가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 28라운드까지도 우승경쟁에 대해 “아직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며 조심스러워했던 라니에리 감독이지만, 왓포드를 꺾은 뒤에는 “우리는 정말 미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놀랍다. 더 이상 불가능은 없다. 긴장도 없다. 우리를 추격해야 할 팀들이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라며 우승 야망을 드러냈다.
심지어 레스터시티 담당 취재진도 달라진 기류에 함박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항상 주변인에 머물던 이들은 왓포드 원정에서 후반 10분 리야드 마레즈의 결승골이 터지자 주먹을 불끈 쥐며 “예스”를 외쳐 눈총을 사기도 했다. 오카자키 신지의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일본 기자들도 레스터시티와 동행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양한 잡지에 기고하는 한 일본 프리랜서는 “유럽 빅리그 우승자가 추가될 수 있는 상황에 일본 팬들도 크게 좋아한다. 특히 레스터시티가 빅클럽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가가와 신지가 도르트문트(독일)에서 우승을 경험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런던 |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