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의 팔자걸음도, 한결 같은 무표정도 이젠 그만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두산 양의지(가운데)가 1일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삼성과 시즌 개막전에서 3회 2점홈런을 친 뒤 무표정으로 강동우 코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국가대표 포수로 성장한 그는 성공과 실패를 기억하는 습관을 통해 ‘아르고스의 눈’을 만들어가고 있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포수도 5곳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팔자걸음에다 무표정…게으르다는 오해도 샀지만
강한 승부욕과 노력, 넓은 시야로 최고포수 성장
여유 있는 팔자걸음, 시크한 표정. 구단 직원들은 그를 두고 ‘양 사장’이라 부른다. 귀찮은 얼굴로 타석에 들어서고, 대충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 같은데 홈런이 된다. 홈런을 쳤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늘 그렇듯 환호작약 대신 무표정, 뜀박질 대신 ‘사장님’ 걸음으로 그라운드를 묵묵히 돈다.
최근 2년 연속(2014∼2015년) 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두산 안방마님 양의지(29) 얘기다. 지금은 그만의 트레이드마크가 됐지만 한때는 팔자걸음 때문에 “게으르다”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 무표정 때문에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혼도 많이 났다.
“어릴 때 뚱뚱했어요. 아버지께서 살 빼라고 야구를 시켜주셨는데, 그 어린나이에도 팔자걸음 때문에 오해를 많이 샀죠. 그땐 그렇게 걷는 것이 멋인 줄 알았어요. 그러다보니 습관이 되고, 이제 고치려고 해도 안 고쳐지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사실 승부욕도 강하고, 생각도 많고, 예민해요.”
이제는 웃으며 말한다. 실제 그는 ‘곰’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여우’처럼 번뜩이는 재치와 ‘번개’ 같은 빠른 눈을 지녔다. 12일 대전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열린 한화전의 플레이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누구도 예상 못한 ‘3∼2∼5(1루수∼포수∼3루수)’로 이어지는 더블플레이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6회말 무사만루의 절체절명 위기였다. 대타 장민석의 1루수 앞 땅볼 때 1루수 오재일이 재빨리 홈으로 던져 3루주자를 포스아웃시켰다. 여기서는 포수가 다시 1루에 던져 더블플레이를 성사시키는 것이 정석. 그러나 양의지는 1루 쪽 대신 갑자기 방향을 3루 쪽으로 선회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달리던 한화 2루주자 윌린 로사리오를 간발의 차이로 잡아냈다. 두산 김태형 감독은 “나도 처음 보는 플레이였다. 순간적인 재치가 빛났다”며 혀를 내둘렀고, 적장인 한화 김성근 감독마저 “영리한 플레이였다”며 극찬했다.
양의지는 “그냥 3루에 던졌는데 운이 좋아 그렇게 됐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는 역발상의 플레이. 그만의 눈이 돋보였다.
“1루 쪽으로 던지려고 하는데 베이스커버가 안 돼 비어 있었어요. 순간적으로 눈에 로사리오가 천천히 달리는 게 보이더라고요. 저도 그런 상황에서 2루주자로 있었으면 당연히 타자가 1루 쪽에서 병살이 되나 안 되나 쳐다보며 천천히 달렸을 거예요. 그런 심리를 역이용했죠.”
흔히 포수는 5개의 눈을 가져야한다고 한다. ▲투수를 봐야하고 ▲타자를 봐야하고 ▲주자를 봐야하고 ▲수비수들을 봐야 하고 ▲벤치의 사인을 봐야한다. 초보 포수는 한 개의 눈을 가지기도 벅차지만, 이 5가지의 상황을 동시에 보는 눈을 가져야 비로소 포수가 된다. 여기에 경기를 읽는 눈을 추가하면 일류 포수가 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야구에서 ‘야전사령관’으로 불리는 포수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르고스’와 흡사하다. ‘아르고스’는 온몸에 100개의 눈을 가진 괴물로, 한번에 모든 눈을 감는 법이 없다. 사물의 움직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에 ‘모든 것을 보는 자’로 통한다.
양의지가 어느 한 순간에 ‘아르고스의 눈’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2006년 입단했으니 올해로 프로 데뷔 11년째. 경험을 통해 기본기를 축적하고, 늘 그것을 기억하는 습관을 들였다. 기본 없는 임기응변은 사상누각이다. 그는 전설적 포수 출신의 김경문 감독(현 NC감독)과 김태형 감독과 만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저는 인복이 많은 사람 같아요. 데뷔 후 김경문 감독님은 저에게 매일 일기를 쓰게 하면서 검사를 하셨어요. 그때부터 그런 습관을 들였던 게 지금도 큰 힘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김태형 감독님은 당시 배터리코치님이셨는데 책임감을 많이 심어주셨어요. 어릴 땐 포수가 한 개의 눈을 가지기도 쉽지 않거든요. 투수만 보는 거죠. 그런데 투수들이 다 형들이니 얼마나 눈치를 보겠어요. 벤치를 쳐다볼 때가 많았죠. 그때마다 김태형 감독님은 ‘자신 있게,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주눅 들지 마라’고 하셨어요. 스스로 이겨보고, 실수를 해야 실력이 는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성공과 실패, 그 과정들이 하나하나 쌓이면서 포수로서 시야도 조금씩 넓어진 것 같습니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일화 한 토막. 3차전 때 팀 승리를 마무리하기 위해 마운드에 오른 이현승(33)이 사인대로 공을 던지지 못하자 양의지는 타임을 걸고 예의 팔자걸음으로 마운드에 올라갔다.
“형, 오늘 게임 지고 독박 쓰고 싶어? 독박 쓰지 않으려면 똑바로 던져. 공 괜찮으니까.” ‘양 사장’ 특유의 시크한 표정과 심드렁한 말투에 긴장했던 이현승도 웃고 말았다.
한때는 오해를 불렀던 팔자걸음과 무표정은 이제 양의지만의 치명적인 매력이다.투수를 감싸는 여유와 강한 심장. 거기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1%까지 찾아내는 ‘아르고스의 눈’까지…. 양의지는 이제 명실상부한 국가대표 안방마님이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