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신승현은 KBO리그 사상 최초로 프로 데뷔 후 17년 만에 ‘별들의 잔치’ 올스타전 초대장을 받았다. 늘 야구의 가장자리에서 살아왔던 그는 첫 올스타전 나들이를 앞두고 “내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라며 감격해했다. 스포츠동아 DB
KBO 사상 최초 프로데뷔 17년 만에 첫 올스타!
꿈도 꾸지 못했던 별들의 잔치 초대장에 감격
난 48번째 별이지만, 작은 별도 빛날 수 있어
한번도 빛난 적이 없었다. 한번도 뜨거운 적이 없었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 아래 군무를 펼치며 이름 없이 살아가는 ‘별꼬리하루살이’들처럼, 그 역시 하루하루 땀내 나는 그라운드에 청춘을 내던지는 무수한 선수들 중 한 명으로 파묻혀 살아왔다.
LG 사이드암 투수 신승현(33). 2000년 SK에 입단하며 프로에 데뷔했으니 벌써 17년차다. 그러나 늘 야구의 가장자리에서 살아오다보니, 주목 받는 인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를 두고 “누구?”라고 다시 묻는다면, 딱히 이렇다할 설명을 하기도 쉽지 않은 선수. 그럴 때면 등장하는 두 가지 연관검색어가 있다. 바로 ‘개명’과 ‘호세’다.
2006년 8월5일 문학구장에서 SK 선발투수였던 신승현은 롯데 외국인선수 펠릭스 호세와 빈볼시비가 붙으면서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에 앞서 2003년 말, 아픈 가정사로 인해 그 전까지 KBO에 등록됐던 ‘김명완’ 대신 ‘신승현’으로 성과 이름을 모두 바꿔 주목을 받기도 했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면서,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됐다.
“제 인생이 태어날 때부터 좀 기구했어요. 제가 원래 1981년생인데, KBO에 1983년생으로 등록돼 있잖아요. 아버지가 동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했는데, 동사무소 직원이 윗분 결재를 받지 못해 기다리고 있다가 잊어버렸나 봐요. 더 기막힌 건 그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제 출생신고가 처리되지 않고 누락돼버린 거죠. 그 사실도 나중에나 알았어요. 제가 1983년생으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법정에서 개명 신청을 할 때 출생연도도 사유가 있으면 정상으로 변경해도 된다고 하던데 그냥 뒀어요. 어릴 땐 원래 나이보다 적어서 안 좋았는데, 나중엔 원래 나이보다 줄어든 게 오히려 좋더라고요.”
그의 말처럼, 그의 야구인생은 기구했다. 전주고 졸업반 때 연고지 쌍방울에 2차 11순위로 지명됐다. 그런데 쌍방울이 곧바로 해체되고, 구단이 느닷없이 SK로 넘어갔다. 군산상고 출신의 동기 이승호가 1차지명을 받고 SK 창단둥이로 ‘황태자’ 대접을 받을 때, 계약금도 못 받고 입단한 신승현은 찬밥 신세였다.
“프로 입단 첫해 전광판에 찍힌 직구 최고구속이 124㎞에 불과했어요. 이승호 그림자만도 못한 존재였죠.”
야구를 한 다음에 한때 반짝했던 시절은 있었다. 2004년까지 5년간 2승에 그쳤던 그가, 직구 최고구속이 150㎞를 넘어서면서 2005년 2차례 완봉승과 12승(9패)의 깜짝투를 선보였다. 생애 처음이자 유일한 두 자릿수 승리. 그러나 2006년 8승을 올렸지만 팔꿈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2007년 팔꿈치인대접합수술을 받았고, 2009년엔 팔꿈치 뼛조각 수술을 받았다. 2011년 일본에 가서 검진한 결과 수술한 인대 쪽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 팔꿈치에만 세 번이나 칼을 댔다.
“그땐 솔직히 하늘을 원망했어요. 내가 왜 아프냐고, 내가 뭘 잘못해서 또 아프냐고, 하늘에 물어봤어요.”
또 다시 시작된 재활. 그도 지쳐갔다. “자포자기 상태였죠. 3군으로 내려 가서 공도 던지지 않았어요. 캐치볼도 안 했어요. 다른 타자들 토스배팅 공이나 올려주고…. 그런데 트레이드 소식이 들리더라고요.”
2013년 5월초였다. KIA가 김상현과 진해수를 주고, SK가 송은범과 신승현을 내놓는 2대2 트레이드. 늘 그랬듯, 그때도 세상의 관심은 온통 송은범과 김상현의 거래에 맞춰져 있었다.
LG 신승현. 스포츠동아DB
“난 딸려가는 선수였으니까, 저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죠. 그런데 당시 KIA 선동열 감독님한테 인사를 갔는데 ‘1군 등록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어쩌면 전환점이 된 것 같아요. 당시 캐치볼도 안 하고 있었는데 볼스피드가 140㎞ 중반까지 나와 깜짝 놀랐어요. 자포자기하고 있던 제가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욕심이 나더군요.”
그해 말 그는 또 한번 팀을 바꾸는 운명을 맞이했다. KIA가 FA(프리에이전트) 이대형을 영입하자, LG가 보상선수로 그를 지명한 것이었다. 이때도 세상의 관심은 온통 이대형이 KIA로 이적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지나면 낮이 오는 것처럼, ‘꼽사리 인생’ 같았던 그에게도 오랜 만에 다시 햇살이 찾아왔다. LG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뒤 이름 석자를 되찾기 시작했다. 패전조에서 추격조로, 다시 필승조로 승격됐다. 스프링캠프에도 참가하지 못했던 그가 올 시즌 LG 불펜의 효자로 거듭나고 있다. 전반기 39경기에 등판해 3승1패, 1세이브, 9홀드, 방어율 3.46. 시즌 개막 이후 힘겹게 버티는 불펜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그에게 더 드라마틱한 선물이 날아들었다. 바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별들의 잔치’ 초대장이었다. 프로 데뷔 후 무려 17년 만에 처음 올스타전에 참가하는 선수는 KBO리그 역사상 신승현이 최초다. 나눔올스타 사령탑인 NC 김경문 감독이 오랜 세월을 버티며 수고한 그를 감독추천선수로 꿈의 마당으로 초대했다.
“소름이 끼쳤어요. 프로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걱정했던 제가, 늘 별책부록처럼 어딘가에 딸려가던 인생이었던 제가, 힘들었던 세월을 참고 기다리고 견뎠더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었어요. 올스타 팬투표 중간투수 후보에 올랐을 때만 해도 100%, 아니 10000%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100명이나 나를 찍을까 했어요. 그런데 팬투표로만 무려 15만표 이상 받았어요. 비록 탈락했지만, 그 사진을 지금도 캡처해 놓고 있어요. ‘정말 내가 맞나?’ 싶어서요. 사진을 보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실실 웃고 그랬죠.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감독추천선수로 올스타전에 나간다니. 올스타전에 참가하는 선수는 정말 최고의 스타들이잖아요. 48명 중에 저는 48번째 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좋아요. 순번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저 큰 별들 사이에 저도 같이 포함돼 어울릴 수 있는 별이 된 게 고맙죠. 저 같은 작은 별들도 여러 개 모이면 아름답게 빛날 수 있잖아요. 정말 다행스러운 건, 힘들었을 때 제 입으로 그래도 마지막까지 ‘유니폼을 벗겠다’고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에요. 야구선수뿐 아니라, 직장 다니시는 분들도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을 거예요. 감히 말하고 싶네요. 무조건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그게 최고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꽃은 뜨거울 때 피고, 차가울 때 진다고 하는데, 야구의 가장자리에서만 살아오던 신승현은 꽃 필 시기를 한참이나 지나 17년 만에 찬란한 ‘별꽃송이’를 피워냈다. 별꼬리하루살이 같이 이름 없이 살아가는 무명씨들에게, ‘올스타 신승현’은 작은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저는 요즘 마운드에 올라가면 투수판을 밟고 혼잣말을 중얼거립니다. ‘자, 한번 놀아보자’고. 긴장을 풀기 위한 저만의 주문이죠. 16일 올스타전 마운드에 섰을 때도 그런 말을 할 거예요. ‘자, 여기서도 한번 놀아보자’고.”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