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왼쪽)-류현진. 스포츠동아DB
우열을 가리는 일이 무의미한 것은 분명하다. ‘20세기 최고 투수’ 선동열(58) 전 국가대표팀 감독과 ‘21세기 최고 투수’ 류현진(31·LA 다저스)은 한국야구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자산이다. 한 명을 띄우기 위해 다른 한 명을 폄하할 이유는 전혀 없다. 또한 활약했던 시기가 10년 이상 차이나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 자체가 무의미한 데다 류현진의 커리어는 현재진행형이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머리는 이를 인지하지만 가슴은 아니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선동열과 류현진이 전성기 때 선발 맞대결을 펼친다면?’, ‘역대 한국야구 최고의 투수를 뽑는다면?’ 등의 상상은 야구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러한 질문들은 잊을 만하면 야구 커뮤니티에 나타나고, 팬들은 각자의 기준으로 갑론을박을 펼친다.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 스포츠동아DB
● “SUN, 미국에서도 통했을 것”
그렇다면 선동열과 류현진을 모두 지켜봤던 야구인들의 생각은 어떨까? 누구에게 물어도 기본적인 대전제는 같다. ‘우열을 따지기 힘든, 우열을 매길 이유가 없는 전설적 투수들’이라는 것이다.
해태 타이거즈(KIA의 전신) 지휘봉을 잡아 ‘투수 선동열’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은 “(류)현진이는 미국에서 활약 중이다. 비록 선동열 감독이 일본에서 뛰었다고는 해도 국내 기록에서는 현진이가 따라갈 수 없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선 감독이 메이저리그에 갔으면 어땠을까 싶다. 국제대회 때 만난 미국인 감독들도 ‘왜 미국에 가지 않느냐’고 아쉬워했을 정도다”며 “병역 등 문제가 있어 미국행에 실패했지만, 만약 메이저리그에 갔어도 충분히 훌륭한 기록을 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허구연 MBC해설위원. 동아닷컴DB
허구연 MBC 해설위원의 생각도 비슷했다. 허 위원은 “선 감독은 국내에서 경쟁자가 없었다. LA 다저스에서도 탐을 냈는데 여러 이유로 미국행이 무산됐다”며 “아직도 ‘선 감독이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기분 좋으면서 아쉬운 상상을 종종 한다”고 회상했다.
이어 허 위원은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임팩트다. 류현진은 2008베이징올림픽에서 결승전 호투를 비롯해 엄청난 활약을 하며 금메달을 안겼다. 하지만 선 감독은 국제대회는 물론 리그에서도 해태 왕조를 이끈 주역“이라고 평가했다.
한대화 KBO 경기 감독관(왼쪽)-SK 손혁 투수코치. 스포츠동아DB
● 파워 피처 vs 제구·구속 겸장
해태 시절 동료로 선 감독과 한솥밥을 먹었으며, 한화 지휘봉을 잡아 류현진을 지도했던 한대화 KBO 경기 감독관은 둘의 공통점으로 ‘요령’을 꼽았다. 한 감독관은 “타자들을 알고 투구를 하는 느낌이었다. 동료로 본 선 감독이나 감독으로 본 류현진이나 든든하기는 마찬가지였다”며 “공교롭게도 에이스 등판 경기 때마다 대부분 타자들이 침묵했다. 선 감독과 현진이 모두 저조한 득점지원에서 만든 결과라 더욱 의미 있다”고 평가했다.
선 감독과 류현진을 나란히 지켜본 야구인들은 둘의 스타일이 확연히 다르다고 설명한다. 모두 뛰어난 투수이지만 선 감독이 ‘파워 피처’라면, 류현진은 제구와 구속을 겸비한 투수라는 설명이다.
손혁 SK 와이번스 투수코치는 현역 시절 선 감독을 직접 상대한 타자들에게 꼬박꼬박 질문을 던졌는데, 그때부터 ‘팔을 가장 앞까지 끌고 나와서 던지는 투수’라는 답을 들었다. 최근에야 익숙해지고 있는 ‘익스텐션’의 개념을 선 감독은 일찌감치 몸으로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근력과 유연성(하드웨어)에 기술(소프트웨어)이 접목돼야 좋은 투수다. 선동열 선배는 모든 걸 갖췄다”고 평가했다. 이어 류현진에 대해서는 “모든 구종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투수다. 어느 누구보다 손의 감각이 뛰어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머리도 정말 좋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훼손된 국보의 명예가 아쉽다
거듭 익명을 요구한 원로 야구인 A는 “현재까지의 성과만 따진다면 선 감독이 조금 앞선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진이는 아직 전성기의 선수다. 얼마나 더 많은 성과를 낼지는 아무도 모른다”며 평가를 유보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히려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른 설문 대상자들이 선 감독과 현진이 중 누구를 더 많이 택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기사가 ‘국보급 투수’ 선동열의 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을까?”
선 감독은 2017년 한국야구의 숙원이었던 전임감독 지휘봉을 잡았고 2018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금메달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불거진 여러 잡음을 혼자 힘으로 버텨나가야 했다. 주위의 어떤 손길도 없었다. 정치권까지 개입하며 국보는 훼손됐다. “우리 야구계가 국보가 훼손되는 걸 막지 못했다. 후배들이 야구계를 위해 헌신하고 싶겠나. 괴물 투수의 가치도 은퇴 후 어떻게 평가받을지 모른다.” 취재 말미 들려온 A의 말이 씁쓸하게 다가온 이유다.
최익래 기자 ing1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