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말의 작가’ 박재희, “내 그림 앞에서 눈물 뚝 … 말이 전하는 희망” ①

입력 2020-09-06 12: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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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은 나를 대신하는 소재이자 매개체
- 아버지의 반대 무릅쓰고 떠난 유학길
- 내 그림에서 평화와 힐링을 얻었으면


말은 소와 함께 인류와 역사의 궤를 함께 해 온 동물이다. 고고학자들은 이미 기원전 5000년 전후부터 말이 가축화되어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이 직조한 예술행위의 대상으로서 말이 즐겨 선택된 것은 이상할 게 없다. 그만큼 말은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을 위해 순종하고 희생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미술가에게 말은 사람의 몸만큼이나 애호되어 온 소재였다. 강렬한 눈빛, 터질 듯한 근육, 철사처럼 뻗쳐 바람에 날리는 갈기와 목에 한껏 돌출된 정맥, 질주하는 운동감은 미술가들의 예술적 본능에 불붙은 장작을 더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박재희 작가는 말을 그리는 작가이다. 인생의 정원을 똑바로 가로지르지 않고 돌고 돌아 다시 붓을 쥐면서부터 그는 오직 말만을 그려 왔다.
세상에 말을 그리는 작가는 많지만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말들은 사뭇 다르다. 박재희 작가의 그림 속 말들은 지금까지 보아 온 역동적인 말의 이미지와 대극점에 서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 ‘이브(EVE)’는 말의 얼굴, 그것도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만이 캔버스 한복판에 둥실 떠올라 있을 뿐이다. 큼직하고 순한 눈은 보는 이의 높이에 정확히 맞춰져 있어 마치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심지어 이 말은 희미하게 미소마저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말의 얼굴을 에워싸고 있는 꽃들은 조용히 그러나 확고하게 이 그림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림 속의 말은 사람 같다. ‘사람 같은 말’이라기보다 ‘말 같은 사람’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다.
박재희 작가를 서울 충정로 스포츠동아 인터뷰실에서 만났다. 왜 그는 사람 같은 말을, 그것도 8년이나 지치지 않고 그려오고 있는 것일까. 그림 속의 말은 누구인가. 그리고 왜 굳이 말이어야 했는가.
그림에 대해, 말에 대해, 무엇보다 사람에 대해 궁금해졌다.



- 말의 눈에 제일 먼저 시선이 가더군요. 말 눈이 아니라 마치 사람의 눈 같았습니다.

“맞아요. 잘 보셨어요.”
박재희 작가가 소리 내어 웃었다.


- 최근 개인전을 여셨죠.

“서래마을 갤러리 well에서 세 번째 개인전(5/27~7/10)을 했어요. 이후 곧바로 구로 넷마블 빌딩 L컨벤션과 신사역 오르세 의원 두 곳에서 메인 초대작가로 참여한 단체전이 있었고요. L컨벤션에서는 9월 23일까지 전시합니다.”


- 전시 작품들이 ‘모두’ 말 그림인가요.

“모두는 아니고 80% 정도는.”


- 작품 속 세계관에서 말은 어떤 존재입니까.

“말은 저를 대신하는 소재이자 매개체죠. 닮은 성향일 수도 있고, 추구하고 싶은 이상일 수도 있어요. 이를 이미지화 하고 싶은데 어떤 소재가 좋을까 탐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의자일지, 창문일지, 하늘일지, 꽃? 사람 얼굴? 뭔가 나를 대변하는 것이어야 하고 나의 철학과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는 것이어야 했거든요. 오랫동안 심사숙고를 한 끝에 말을 선택하게 된 겁니다.”


- 작가의 철학과 메시지를 담아내는 매개체로서의 말이로군요. 그렇다면 담고자 하는 철학과 메시지에 대해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제 인생에서 제가 가진 생각이 확장되는 어느 시점이 있었어요. 세상에는 사람들이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들이 있죠. 그 안의 역사를 그려 나갈 때는 대부분 나로부터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굉장히 중요해요.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미래의 인연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주안점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만나고 싶은 만남이 있는가 하면 원치 않는 만남도 있죠. 인간 때문에 겪는 다양한 감정과 경험들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연법칙 안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소통이란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 결국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좋은 관계성을 한 명 한 명이 만들어 나가면 나와 우리의 관계가 좋은 사회로, 나아가 국가로 발전이 되고 이는 나라 대 나라의 관계가 되어 세계적으로 확장이 되어 가는 거죠. 좋은 관계성을 만들 수 있다면 좋은 세상이 올 수 있겠구나. 이런 개념의 확장이 이루어진 시점이 제게 있었습니다.”


- 개념의 확장은 개인적인 경험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살면서 고비 고비가 있었죠. 힘든 순간마다 다행히 신앙이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밑받침으로, 부족했던 사랑을 받아 다시 한 번 이를 승화해내면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어요. 내가 받은 사랑을 깨닫고 감사함으로써 다시 희망적인 메시지로 밝은 에너지를 내고나니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뭔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더라고요.”


- 그 희망의 메시지를 작품 속에 담으신 것이군요.

“힘든 상황 속에 계시는 분들이 제 그림을 보고 조금이라도 평화를 느끼고, 마음속에 평정심을 얻고, 또다시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도약의 발판을 얻으시길 바라는 거죠. 힐링적인 요소를 얻고 싶으신 분들께 그런(희망의) 메시지를 전해드리고 싶어서, 그런 마음으로 그립니다.”



- 작품을 보고 힐링의 에너지를 얻었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은데요.

“많으세요. 첫 번째 개인전은 온갖 사랑의 이야기를 담았죠. 저도 많은 고비와 우여곡절, 희로애락을 겪으며 이를 돌파하는 가운데 붓을 쥔 거였거든요. 제게도 누구 못지않은 간절함이 있었죠. 보시는 분은 물론 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또 찾기 위한 여정으로 2회에 이어 3회 개인전까지 왔고 앞으로도 지향해서 그릴 겁니다. 전시회에서 제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분도 계시다고 들었어요. ‘그림을 보고 힐링 얻고 간다’는 말씀도 많이 듣고 있습니다.”


- 그 힐링의 에너지를 각자의 삶 속으로 가져가서 주변에 전하고, 그 영향력이 더욱 퍼져 나가길 바라시는 거군요.

“네네. 그렇죠.”


- 처음부터 말 그림을 그리신 것은 아니겠죠.

“미국 유학시절에는 피규어(figure)에 관심이 많았어요.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거죠. 인생사가 얼굴에 다 스며들게 되니까. 사람들은 모두 각자 유니크한 존재예요. 그 사람만의 미(美)라는 것이 있죠. 그걸 찾아서 그리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 그러고 보니 그림 속의 말들이 마치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제 말 그림에는 각각의 특성들이 숨어 있어요. 특히 눈망울은 제가 나누고 싶은 것을 눈빛으로 그리는 경우가 있죠. 그걸 보시는 분들은 저와 감성적인 소통이 되시는 거죠.”


- 미국의 명문 MICA 미대에 5명 입학 장학생 후보 중 한 명으로 입학하셨죠. 미국 유학은 어떻게 결심하게 되셨나요.

“어려서부터 외국에 대한 호기심이 컸어요. 흑백TV 시절에 AFKN을 틀어놓고 알파벳을 따라 흉내 낼 정도였으니까요.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께 ‘외국 보내달라’는 말을 했어요. 미술을 전공하기로 하면서 본격적으로 유학을 결심하게 되는데 ….”


- 반대가 있었군요.

“네. 아버지께서 ‘딸은 절대로 해외로 보낼 수 없다’고 하셨거든요. 저희 집안이 법조인 집안이기도 하고, 굉장히 완고한 분위기였어요. 예술을 하더라도 음악은 되는데 미술은 안 된다는 거였죠.”


- 음악과 미술이 왜 차별을 받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반대를 무릅쓰고 유학을 가신 거군요.

“할머니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부탁드렸어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도쿄대 유학생이셨거든요. 두 분 모두 유학생활을 하셨으니 저를 이해해 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집안 제일 큰 어른들께 이해를 받으면 다시 아버지께 청할 수 있을 테니까.”


- 결국 아버지께서 허락을 하셨군요.

“처음 파리행 비행기 티켓을 아버지께서 찢으셨어요. 그리고 타협안이 나온 게 미국이었죠. 미국은 외가 친척이 이민을 가 있는 나라이기도 했고. ‘네가 갈 수 있는 곳은 외가가 있는 미국뿐이다. 그곳에 미대가 있으면 그곳에만 정해서 오로지 그 기회로만 움직여야 한다’라는 게 아버지의 마지막 조건이었어요. 그것도 딱 한 군데만 지원을 할 수 있었죠. 다행히 좋은 통보가 와서, 제 면이 선 채 유학을 가게 된 거였습니다.”


- 어쩐지 아버님께서 ‘여긴 설마 안 되겠지’하고 커트라인을 일부러 높게 잡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거죠(웃음). 이거 아니면 못 살 거 같아서 정말 기도를 많이 했어요.”


- 1995년 귀국을 해서 어떻게 보면 미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을 하게 되시는데요.

박재희 작가는 MICA에서 BFA(순수미술학사)를 마치고 1995년 귀국해 YBM영어학원 강사와 한국 오라클 마케팅 부서 등에서 일했다.

“부모님 권유 때문에 일을 하게 된 거였어요. 집에서 놀지 말고 일하는 게 어떠냐고(웃음). 그런데 업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돌고 돌아서 결국 이 자리로 왔으니까요. 이런 저런 일로 애로를 많이 느끼면서 ‘이 고비를 그림으로 다시 넘길 수 있다면’, ‘붓을 쥐고 살아갈 수 있다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던 시점이 있었어요. 그리고 기도를 하게 되죠. 우연치 않게 기회가 찾아와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저는 미술을 제 천업으로 여기면서 ‘죽을 때까지 붓을 쥐겠다’ 다짐을 하게 됩니다.”



- 다소 엉뚱한 길을 돌아오신 거군요.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제프 쿤스(Jeff Koons)의 예가 좋은 사례가 되겠군요. 현대미술의 거장인 이 분은 저희 학교 선배님이시기도 한데요. 이분이 시카고 대학을 나와서 우리 예술대학으로 오셨어요. 그런 다음에 뉴욕으로 가서 증권회사에서 일하시죠. 세계 경제의 흐름과 정세를 다 알고 나서는 다시 아티스트로. 그래서인지 자신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잘 포착하고 스마트하게 브랜드화 하는 일에 굉장히 뛰어나세요. 이 분이 아티스트로서만 살지 않으셨다는 점에서 저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박재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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