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신발로 풀어 본 4인 4색 캐릭터
‘절반쯤’ 열린 결말 … 열쇠는 마이클 손에
디스토션을 잔뜩 먹은 기타는 4분 음표가 끝없이 찍힌 듯한 단순한 리프를 반복했다. 심장이 맥박 치듯 극의 혈관 속으로 긴장감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절반쯤’ 열린 결말 … 열쇠는 마이클 손에
뮤지컬 머더발라드는 스타일이 근사한 작품이다.
혹자는 이 작품을 두고 ‘뮤지컬 버전 사랑과 전쟁’이라고도 했던 모양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남녀 간의 막장 드라마를 품고 있다.
초연 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우선 무대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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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공간의 중심이 되는 데자뷰 바가 당구대에서 삼각형 무대로 변경되었다. 거대한 삼각김밥을 쓰러뜨려 놓은 듯한 무대인데 상부를 모델의 런웨이처럼 다듬어 놓아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기능하도록 했다.
술집의 스탠드로도 활용되는 삼각무대는 은근히 높이가 있건만 배우들은 펄쩍 펄쩍 잘도 오르내렸다. 보통사람이라면 세 번만 뛰어 올라도 숨이 가빠올 것이다.
삼각무대는 이 극에서 곧 벌어질 막장 삼각관계를 형상화해놓은 의미도 있다.
같은 작품을 몇 번쯤 보게 되면 보이지 않던 곳에 시선(대부분은 쓸데가 없다)이 가게 되는데, 이날은 캐릭터들의 신발에 꽂혔다.
예를 들어 사랑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탐의 신발은 군화를 연상케 하는 짧은 부츠다. 사랑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하는 탐을 상징하는 듯한 신발이다. 검은색이고, 이는 내레이터의 꽉 끼는 롱부츠와 같은 컬러다. 탐은 이렇게 내레이터와 연결되어 있다. 교차점 없이 평행선을 달리던 둘의 관계는 극의 종반을 몇 분 남겨두지 않고서야 치열하고, 위태롭게 ‘제대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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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의 신발은 내레이터에 비해 넉넉한 사이즈의 롱부츠다. 옅은 브라운 계열의 컬러인데 이는 블랙과 화이트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다. 블랙과 화이트를 모두 향할 수 있지만,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다.
세라의 부츠는 그의 타락과 퇴폐, 혼란, 방황을 상징하는 아이템이다. 네 명 중 신발을 바꿔 신는 인물은 세라뿐이다.
예상했겠지만 모범생 마이클의 신발은 눈처럼 하얗다. 운동화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죽신발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마이클의 순수하고 긍정적인 성품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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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명과 마이클은 참 잘 어울린다. 이건명이란 ‘사람’의 이미지는 마이클의 그것과 90% 정도 일치할 것이다. 그래서 마이클의 분노는 더욱 크고 뜨겁게 공감되었다. 순한 사람이 한번 화를 내면 무섭게 내지 않던가.
마이클의 분노 안에는 배신감, 허탈함, 모욕감이 뒤범벅되어 있을 것이다. 이건명 마이클은 분노의 한줄기 방향을 틀어 자신을 향하게 만들었다. 교향곡 4악장 피날레에서 모든 악기가 일제히 포효하는 투티처럼 그의 분노는 뜨겁게 폭발하고, 슬프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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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범의 탐은 연구가 많이 되어 있다. 사랑을 향해 눈을 감고 돌진하는 남자의 무모함을 공감하게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레이터 소정화는 이 작품의 터줏대감으로 초연부터 함께 하고 있다. 뒤늦게 보았지만 ‘과연 소정화다’ 싶다. 열정과 냉정 사이를 오가는 내레이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현악4중주의 비올라 같은 존재로 이 작품의 중심을 단단하게 지지하고 있다.
김소향의 세라는 정말 근사했다. 세라는 순수와 퇴폐의 두 얼굴을 가진 캐릭터. 그런데 김소향은 두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한 얼굴 안에서 두 개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과연 이런 것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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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묘기’ 덕분에 세라는 순수할 때조차 퇴폐적이고, 퇴폐적일 때조차 순수하다. 두 남자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세라의 사랑을 탐할 가치가 있다.
사람은 자신의 부재를 채워줄 수 있는 대상과 쉽게 사랑에 빠진다. 마이클과 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이클은 자신이 갖지 못한 세라의 퇴폐적인 아름다움, 탐은 그의 순수한 영혼에 이끌렸을 것이다. 김소향은 두 명의 세라가 아닌, 한 명의 세라만으로 두 남자와 다른 사랑을 보여준다.
그나저나 마지막 떡밥.
마이클은 세라에 대한 용서와 관용에 성공했을까. 두 사람은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까.
이 작품의 결말은 ‘절반쯤’ 열려있다.
‘절반쯤 열려있다’라는 표현을 굳이 쓴 이유는, 정답이 정해져 있되 달라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는 이 극의 마지막 장면. 조명이 아웃되기 직전 그날의 분위기와 관객의 반응에 따라 마이클의 뉘앙스도 미묘하게 변화한다.
오늘은 사랑, 내일은 안녕.
이 길고 지루한 감상문도 이쯤에서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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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