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종이컵 속의 차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권오민은 컵을 들어 남은 녹차를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입맛이 쓴 것은 이 승부가 불길하기 때문일 것이다.
백홍석이 슬그머니 자리를 뜨더니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 뻣뻣한 허리라도 펴고 오려는 모양이다.
권오민은 반상으로 깊숙이 머리를 묻었다. 그리고는 <실전> 흑3으로 백 한 점을 따냈다.
‘본래는 <해설1> 흑1로 따내야 한다. 하지만 이건 백이 선수로 상변을 넘어가게 된다(7-△). 너무 크다. 흑이 견딜 수 없다.’
권오민의 미간이 좁혀졌다. 읽어도 읽어도 좋은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바둑판 위로 안개가 자욱이 뿌려진 느낌이다. 안경을 벗어 북북 문질러보아도 시야는 여전히 흐렸다.
<실전> 백6이 결정타가 되었다.
권오민의 불길한 예감이 종내 적중하고 만 것이다. 권오민은 눈을 감았다.
이 백6에 흑은 응수가 없기에 결국 7로 두고 말았다. 원래는 <해설2> 흑1로 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결과는?
‘축이다. 흑이 망했다.’
권오민은 눈을 감은 채 희미하게 웃었다.
백홍석은 그 웃음을 보았다. 그리고 웃음의 뒷면을 투명하게 읽었다.
상대는 이 바둑을 던지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권오민은 20여 수를 더 두어놓고는 깨끗하게 항복을 선언했다.
다 끝난 바둑을 더 진행시킨 것은 ‘혹시나’하는 마음에서라기보다는 ‘던지는 모양’을 조금이라도 깔끔하게 만들고 싶었던 때문일 것이다.
프로는 패배도 프로다워야 하는 것이다.
(202수, 백 불계승)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해설=김영삼 8단 1974ys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