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가출호가 1년에 걸친 총 3000km의 바다 올레길 대장정을 위해 드디어 돛을 펼쳤다. 선원들은 전곡항을 빠져나오며 독도까지 머나먼 바닷길을 떠올렸다. 이정식 스포츠 포토그라퍼
식객 허영만과 함께 떠나는 한반도 바닷길 요트 일주
1. 출항준비부터 첫 항해까지
1년 전 이맘 때, 1. 출항준비부터 첫 항해까지
서울 인사동 선술집 ‘식객’의
구석방에서 등산을 즐기는 ‘침낭과 막걸리’의
멤버들과 함께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허영만 화백은 혼잣말처럼 뜬금없는
화두를 던졌다. “사실 길은 어디나 있잖아?
땅을 벗어나서 이번엔 바람으로 가는
돛단배를 타고 바다의 백두대간을 가는
거 어때? 서해에서 남해를 돌아
국토의 막내, 독도까지.”
옆에 있던 히말라야의 사나이 박영석 대장이
허 화백을 거들었다.“파도와 싸우며
바람을 타고 독도까지∼ 야, 그거 좋은데요.”
쇠뿔은 단김에 뽑혔다.
허 화백이 15년이 된 낡은
40피트급 레이싱 크루저를 사들였고,
배 이름을 ‘집단가출호’로 명명했다.
가출하는 각오가 아니면 독도까지 갈 수 없다는 뜻이다.스포츠동아는 허 화백의 도전과 같이 하기로 했다. ‘식객 허영만과 떠나는 한반도 바닷길 요트 일주’다.
무인도인 선갑도 앞에서 만난 어부들이 선물한 아귀. 굴업도에서 먹어본 물텀벙 백숙의 맛을 못 잊어 그 맛을 재현해보기 위해 똑 같이 말리고 있는 중이다. 오른쪽은 항해도중 바닷길의 낭만에 취한 선원들.
등산을 매개로 허 화백과 인연을 맺은 다양한 인물들이 선원으로 징집(?)됐다. 전문 산악인 박영석을 비롯해 고층빌딩 유리창닦이, 보험사 영업사원, 건설현장 작업반장, 치과의사, 목수, 사진작가 등 선원들의 직업 구성은 다양했다. 몇몇은 요트조종면허를 갖고 있었으나 대부분이 바다 항해를 경험하지 못한 초짜 선원들이다.
이 때문에 아시안게임 요트 금메달리스트인 정성안 코치(여수시청)와 요트 선수 출신 홍선표의 막판 합류는 집단가출호에게 천군만마였다. 각자 생업이 있으니 백두대간을 구간 종주하듯 한 달에 한 번 주말을 끼고 2박3일 혹은 3박4일씩 항해해 1년 후 독도에 골인하기로 결정했다.
국제보트쇼와 코리아컵 세계요트대회 등 요트 관련 빅 이벤트를 진행 중인 경기도가 항해를 후원하기로 하면서 계획은 한층 힘을 받아 일사천리로 추진됐다. SK텔레콤은 첨단 무선통신 설비와 IT 솔루션을, 아웃도어 의류 메이커 노스페이스는 항해용 의류를 지원키로 했다.
장거리 항해를 준비하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낡은 배를 수리하는 일. 집단가출호는 요트 디자인계의 거장 브루스 파가 디자인한 Farr40모델이다. 한때 레이스에서 명성을 날리던 배지만 선령이 오래되고 일본에서 몇 년간 퇴역선처럼 정박해 있었던 탓에 항해용 전자장비가 전무했고, 엔진도 상태가 심각했다. 봄이 오자 집단가출호 선원들은 배를 뭍으로 끌어올려 대대적인 수리작업을 시작했다.
허 화백은 주말마다 선원들을 이끌고 배가 있는 경기도 전곡항에서 먼지와 기름을 온 몸에 뒤집어쓰고 녹초가 되도록 수리작업을 하며 봄을 보냈다. 폐선에 가까웠던 배가 모두의 정성에 힘입어 다시금 멋진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꽤나 가슴 뿌듯한 일이었다.
수리된 집단가출호에 탄 첫 게스트는 김문수 경기도 지사였다.
김 지사는 3000km에 달하는 먼 바닷길을 앞둔 집단가출호의 장도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수리 후 시험 항해에 선원으로 동승했다. 전 세계 레저보트 관련 업체가 참가하는 국제보트쇼와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매치레이스를 유치한 김 지사는 세계 선박 시장의 50%%를 차지하는 레저보트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장기 계획을 추진 중이어서 레저보트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세일링 요트 집단가출호의 한반도 일주 항해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영해의 외곽 섬을 돌아 독도까지 가는 집단가출호의 항로는 돛단배로서는 최초로 시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테스트 세일링에서 세부적으로 불완전한 사항들이 발견됐으나 다행히 운항이나 안전에 지장을 줄 큰 문제는 없었다. 모자란 부분은 항해를 계속하며 차차 고쳐가기로 했다.
그런데 집단가출호의 계획은 첫 단추부터 삐걱댔다. 백령도가 NLL 문제를 둘러싸고 남북 갈등의 진앙지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2번째 목표였던 굴업도가 백령도 대신 첫 번째 기항지로 정해졌다.
게다가 선원 중 한 명인 박영석 대장은 결석이었다. 출항 10여일 전 에베레스트에서 가장 위험한 루트인 남서벽 등반에 성공, 2년 전 산화한 오희준 이현조 대원의 원을 푼 박 대장이 출항일까지 네팔에서 귀국하지 못한 것이다. 박 대장은 고산 등반에도 달인이지만 어떤 재료로든 최고의 맛을 내는 요리의 달인이기도 해 집단가출호에 있어서 빠져선 안 될 음식 담당이었다.
마침내 출항일인 6월 5일 낮 12시. 6개월 여의 치열한 준비 끝에 집단가출호는 드디어 돛을 올려 전곡항의 비좁은 수로를 빠져나갔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7노트로 부드럽게 불어왔다. 풍향은 서북서로 목적지 굴업도는 정확히 맞바람의 방향에 있었다.
이작도 남쪽을 지날 무렵 키를 잡고 있던 허 선장이 배 오른편을 가리킨다. 상괭이 서너 마리가 오르락 내리락 자맥질을 하며 배를 따라 헤엄치고 있었다. 돌고래의 친척뻘인 상괭이는 수줍음을 많이 타고 경계심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녀석들은 20여m의 간격을 두고 확실하게 배의 진로와 평행선을 그리며 쫓아왔다.
엔진으로 가는 다른 배들과 달리 조용히 미끄러져 가는 점이 좋았는지 상괭이들은 멀리 이작도가 보일 때까지 꽤 오래도록 배 주변을 맴돌았다.
첫 항해의 첫 끼니 메뉴는 라면이었다. 그것도 점심때를 훨씬 지난 오후 3시. 약한 바람을 모아 조금이라도 빠르게 달리도록 모두들 시트(돛을 조종하는 로프류)를 잡고 씨름하느라 식사 준비를 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영석이가 왔더라면 지금쯤 회덮밥이 나왔을텐데… 바다에서 첫 식사가 라면이라니…” 그래도 이날 라면은 맛있었다.
돛단배는 바람의 지배를 받는다. 모터보트가 아닌 이상 아무리 애를 써봐야 바람보다 빨리 달리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바람이 없는 날, 우리 배는 당연히 느렸다. 유리처럼 평평한 바다를 4노트(1노트는 시속 1.852km)의 소걸음으로 간다. 최종 목적지 독도까지 약 3000km의 바닷길을 남겨둔 우리에게 바람이 정해주는 속도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였고, 또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돛단배만의 낭만이었다.
굴업도 동북쪽으로 열린 선착장 앞에 닻을 내리고 고무보트를 이용해 상륙했을 땐 바다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따개비와 해조류로 뒤덮인 선창엔 굴업리 서인수 이장님이 트럭을 몰고 홀로 마중 나와 있었다. 트럭에 야영 짐을 실어 보낸 뒤 선창에서 큰 마을까지 포장도로를 산책 삼아 걸었다.
수평선에서 돋아난 달이 빛을 뿌려 섬마을 길은 호젓했다. 큰 마을로 접어드는 고갯마루는 전망이 좋았다. 달빛 교교한 밤바다에 멀리 덕적도의 불빛이 휘황하다.
어업과 민박을 겸하고 있는 이장댁의 밥상은 소박하고 정갈했다. 꽃게탕과 함께 돌김, 아구찌개, 취나물, 달래 장아찌… 갓 지어 뜨거운 쌀밥에 안주인이 양푼 가득 내어온 갯내 향기로운 간장 게장이 5분 만에 깨끗이 비워 졌다.
굴업도 민박집의 식사 메뉴는 손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정해진다. 반찬이야 미리 준비해둔 것들이지만 찌개나 구이는 그 날 바다에서 잡힌 해산물의 종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다해서 8가구 20여명, 국내에 있는 리(里) 중 가장 작은 규모인 굴업도의 밤은 적막했다. 이장댁에서 100여m 떨어진 큰마을 백사장에 침낭을 펼쳤을 때 달은 중천에 둥실 떠올랐다.
집단가출호의 항해에는 미리 정해둔 2가지의 규칙이 있었다. 첫째 쓰레기를 절대 만들지 말자는 것, 둘째 지붕이 있는 곳에서는 잠자지 말자는 것. 둘째 규칙은 바다와 섬과 포구를 온전히 겪어보자는 취지에서 정한 것으로 비가 내리지 않는 이상 침낭과 매트리스만 갖고 백사장이 됐건, 방파제가 됐건 야영을 하자는 것이다.
집단가출호 선원들의 첫 야영지는 큰마을 백사장에 있는 헬기 착륙장이었다. 밤바람에 잔물결이 일어 달빛은 바다 가득 부서졌다. 달에 취해있을 때 이장님이 아귀를 해풍에 반건조 시킨 뒤 떡을 찌듯 쪄낸 물텀벙 백숙을 가져왔는데 놀랄만한 맛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햇살이 눈부셔 일어나보니 허영만 선장이 보이지 않는다.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 날아간 듯 빈 침낭만 남아있다. 모래밭에 발자국이 개머리 쪽으로 길게 나있어 발자국을 쫓아 시선을 돌리니 허 선장은 어느새 저 멀리 구릉 꼭대기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착장 쪽에 묘박 중이던 배를 우리가 비박했던 큰마을 해변 앞바다로 옮겨둔 뒤 대원들은 해변을 산책했다. 아침 햇살 속에 드러난 굴업도는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마침 간조여서 물이 많이 빠져 있었는데 바닷물이 물러간 저 끝까지 곱디고운 모래가 펼쳐졌다. 모래밭엔 간밤에 해변을 돌아다닌 사슴 발자국들이 선명했다. 굴업도엔 십여 년 전 꽃사슴과 레드디어 몇 쌍을 방목했는데 저희들끼리 새끼를 치고 번식해 이제 그 숫자가 100여 마리에 이르고 있다.
해변 끝에서 시작되는 호젓한 오솔길을 통해 개머리로 발길을 옮겼다. 절묘하게 풍화된 바위와 모래로 이뤄진 구릉엔 소사나무가 원시림을 이루고 있었고, 개머리 중턱부터 남쪽 사면으로 억새밭이 장쾌하게 펼쳐졌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억새 초원에 사슴 한 쌍이 풀을 뜯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섬은 오래 시달려왔다. 핵폐기장으로 결정됐으나 지질조사 결과 부적합 판정을 받아 살아났다가 이번엔 한 대기업이 골프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어 숨을 죽이고 있다. 골프장 논란 이후 육지 사람들의 발걸음이 늘었고, 사람들은 섬을 이룬 구릉의 능선과 골짜기에 오솔길을 냈다.
굴업도 오솔길은 개머리부터 굴업도 최고봉인 덕물산 정상(122m)을 지나 선착장이 있는 동쪽 끝까지 약 4km에 걸쳐 이어져 있다. 천천히 걸으면 4시간쯤 되는 트레킹 코스로 사방 어디에 눈길을 던져도 절경이다. 아마도 국내 섬 트레킹 코스 중 이곳만큼 아름다운 곳을 다시 찾기 어려울 듯싶었다.
허영만 선장(가운데 빨간 모자)과 선원들이 덕적군도 남쪽에 있는 선갑도에서 이틀째 밤을 맞아 낚시로 잡은 놀래미를 재료로 매운탕을 끓여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이정식 스포츠 포토그라퍼
오전 11시, 마을회관 기능까지 하고 있는 이장댁에 ‘식객’ 단행본 한 세트를 선물하고 굴업도를 떠났다. 울도 쪽으로 남하해 선단여를 두 바퀴 돌았다. 다음 비박지인 선갑도로 가는 항로에선 멀어지지만 선단여 부근의 아름다운 바위섬들의 유혹을 뿌리치긴 어려웠다.
한때 낚시 깨나 즐겼다는 허 선장에게 저녁 찬거리 조달 과제가 안겨졌다. 수심계에는 어군탐지기 기능도 있어서 낚시하기 좋은 곳을 찾아 무인도인 선갑도를 북쪽으로 돌아 작은 백사장 앞에서 닻을 내렸다.
모두 선장의 낚시에 기대를 걸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만일 못 잡으면 밥과 김치 밖에 먹을 게 없는 상황. 하지만 갯지렁이를 미끼로 쓴 허 화백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팔뚝만한 놀래미 3마리를 꿰어 올렸고 저녁 반찬 걱정에서 해방된 선원들은 고기가 걸려들 때마다 환호했다.
해질 녘, 어선 한 척이 어구를 펼치며 우리 배 쪽으로 접근했다. 낯선 배의 출현으로 잔뜩 긴장한 우리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배를 바짝 붙이더니 다짜고짜 노란색 바구니를 내민다. 바구니엔 아귀와 갑오징어가 들어있었다. 거칠게 표현된 바다 사나이들의 우정이다. 우리도 답례로 아껴뒀던 고량주 한 병을 저쪽 배로 건넸다.
낚시로 잡은 놀래미는 섬에 상륙해 찌개로 요리했다. 식사 준비가 끝나 기대에 차 국물을 떠먹어본 순간, 모두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국물이 쓰다!” 쓸개를 빼내지 않고 끓인 탓이었다. 몹쓸 맛의 ‘놀래미 쓸개탕’은 이날 밤 집단가출호 선원들이 겪은 혹독한 시련의 전조였다. 해가 떨어지자 모기떼의 습격이 시작된 것. 바다 모기는 매서워서 주사 바늘 같은 주둥이로 얇은 셔츠쯤은 쉽게 뚫었다. 견문발검(見蚊拔劍)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이날 밤 굶주린 모기떼에 시달리며 검이 아니라 대포라도 있다면 쏘고 싶었다. 모기는 이 무인도 생태계 최상위의 포식자였고 우린 속수무책으로 피를 빨렸다. 특히 침낭에 들어가 숨을 쉬기 위해 내민 얼굴이 모기의 무자비한 공격 목표가 됐다. 그 와중에도 허 선장은 “이 동네 모기들은 오늘 우리가 안 왔으면 대체 뭘 먹고 살았을까”라는 유머를 날렸지만 모기와의 전쟁은 심각했다.
새벽에 또 다른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조류에 밀린 어선과 우리 배의 닻줄이 엉켜 충돌 위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어선은 튼튼하게 만들어 어지간한 충격엔 꿈쩍도 않지만 세일링 요트의 선체는 계란처럼 약하다. 바람으로 가는 배인지라 무게를 줄이기 위해 선체의 두께가 매우 얇기 때문에 어선과 부대끼다가는 필경 깨져버릴 것이었다. 서둘러 고무보트를 타고 배로 접근해 약 1시간여의 작업 끝에 서로 엉킨 닻줄을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안개 속에 이슬비까지 내리는 이튿날 아침, 배의 통신 설비와 풍향계 시스템에 문제점이 발견됐다. 당초 안흥항까지 내려간다는 계획이었으나 문제가 생긴 이상 출발했던 전곡항으로 다시 돌아가 문제점을 확실히 해결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 기수를 전곡항과 같은 방향인 풍도 쪽으로 돌렸다. 풍도로 떠나는 길은 피곤했다. 밤새 모기에 시달리느라 잠을 설친 멤버들 중 일부는 항해 중 꾸벅꾸벅 졸았다. 다음 항해부터는 모기에 대한 대책을 최우선 순위로 마련하자는데 이견이 없었다.
낮 12시, 낚시 온 사람들로 붐비는 풍도에 상륙해 점심식사를 했다. 아침에 그물에서 걷어온 꽃게 몇 마리로 끓인 탕은 맑고 낭랑했다. 놀래미 새끼를 소금에 절여 말린 뒤 연탄불에 구운 것을 내왔는데 법성포 굴비에 버금갈 만큼 일품이었다.
전교생이 6명인 풍도초등학교에 책 선물을 전달한 뒤 다시 길을 떠났다.
통발 등 어구가 지뢰처럼 깔린 바다엔 해무마저 짙게 드리워져 거대 선박들이 교차하는 ‘바다 위의 고속도로’ 항로를 횡단할 땐 초긴장 상태였다. 속도가 우리 배보다 훨씬 빠른 거대한 화물선이나 군함은 잠시 한 눈을 팔면 어느새 위험 거리로 다가왔다. 선박들의 낮고 둔중한 무적에 화들짝 놀라 우리도 쉴새 없이 무적을 불어댔다. 오후 4시, 안개가 걷힌 가운데 낯익은 제부도의 빨간 등대와 누에섬의 파란 등대가 보였고, 사흘 전 떠났던 전곡항이 펼쳐졌다.
입항 마무리 작업을 마친 뒤 우리들은 악수를 나누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 텁수룩한 수염, 무엇보다도 모기에 물려 얼굴이 퉁퉁 부은 모습이 가관이었다. 우리의 첫 번째 집단가출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다음 가출은 7월 3일부터 5일까지 격렬비열도와 파수도를 거치는 바닷길로 이어진다.
달빛 이불삼아 야영 “호텔이 부러우랴”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cafe.naver.com/grouprun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