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선택 늘 존중”… 가수 씨엘의 아버지 이기진 교수
그는 물리학자이면서 동화작가다. 만화를 그리면서 고등학생을 위한 학교홍보물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쓴다. 프랑스, 일본, 아르메니아공화국, 러시아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두 딸을 위해 그림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이 교수를 설명하는 다채로운 수식어가 끝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교수의 큰 딸 채린 씨(19)는 인기 아이돌 그룹 2NE1의 리더이자 카리스마 있고 당찬 캐릭터로 인기가 높은 ‘씨엘’이다. 연구실만큼이나 이 교수의 자녀교육법은 자유롭고 특별했다.
최근 이 교수는 서강대학교SLP와 공동으로 초등생을 위한 영어사전인 ‘이미지 사전(프로젝트 409)’을 펴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권장하는 1300개의 초등 필수단어를 쉽게 이해하도록 그림으로 표현한 사전이다. 단어와 연관된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톡톡 튀는 일러스트는 전부 이 교수가 직접 그렸다.
이 교수의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깍까’는 가족과 함께 일본에서 생활할 때 탄생했다. 두 딸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기 위해 이 교수는 직접 깍까가 남극, 우주, 밀림으로 여행하는 모험기를 쓰고 스케치북에 그림으로 담았다. 동그란 얼굴에 발만 달린 깍까는 눈과 입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당시 두 딸이 “재미있다고 후딱 읽었던” 동화는 ‘박치기 깍까’라는 책으로 엮였다.
이 교수의 글과 그림은 단순하고 엉뚱하다. 그는 자신을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머리 위에 바나나를 올린 캐릭터로 표현한다. 50대 교수가 그린 그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롭고 유쾌하다. 그의 가족은 결혼 초 12년 동안 10회 이상 이사했다. 서울 마포, 대치동, 밤섬, 홍대 앞 전셋집을 옮겨 다녔다. 유학했던 프랑스와 일본에서도 각각 두 번씩 집을 옮겼다. 이 교수는 “새로운 동네, 새로운 환경에서 가족과 함께 ‘모험’하면서 발상을 전환하고 다양한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느낀 것과 생각한 것을 기록하는 습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간단한 기록일지라도 1년, 10년이 지나면 개인의 역사로 남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도 일상을 기록하도록 지도했다. 두 딸은 수첩에 극장표, 책을 구입한 영수증 등을 붙이고 하루 일과를 남겼다. 이 교수는 “생각을 표현하는 습관은 또 다른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출발이 된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한 아트 숍에 전시된 그의 로봇 작품은 10년 전 만들었던 깍까 캐릭터가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자녀가 어떤 요구를 해도 그 요구에 자녀의 진지함이 담겼다면 이 교수는 머뭇거림 없이 “오케이!”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큰 딸 채린이 재즈댄스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이 교수는 직접 학원을 수소문해 등록해줬다. 채린 씨가 학교의 기념 앨범을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땐 직접 인쇄소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만약에 아이가 빨간 모자와 파란 모자가 있을 때 뭘 살까를 고민하면 고민할 시간에 두 개를 다 사고 필요 없는 나머지 하나는 친구에게 선물하라고 조언한다”면서 “고민하고 머뭇거리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과연 이 교수는 가수가 되겠다는 딸의 의견에도 흔쾌히 ‘오케이’ 했을까?
“그 친구(이 교수는 큰딸 채린을 ‘친구’라고 표현했다)에게 가수가 최종 목표인지는 알 수 없어요. 인생을 완성해가는 과정이죠. 나중에 그 친구가 화가나 교수가 된다고 할 수도 있고 옷 장사를 하겠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정답은 없어요.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대신 재미있게 했으면 좋겠어요.”
이 교수는 두 딸이 평생 즐거운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건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연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탁월한 연구도 훌륭하지만 자신의 환경과 역량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은 연구라고 생각한다.
이 교수는 “자신의 일(공부)을 즐기기 위해선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모는 자녀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는 것. 이 교수는 “나도 20대 때부터 책을 쓰겠다고 다짐했지만 정작 40대가 되어서야 여러 권 책을 만든 것처럼 아이들도 때가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해낼 것”이라면서 “불안한 마음에 자녀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맞추려는 욕심과 고집을 버려야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고3 때까지 부모가 만들어놓은 길을 걷다가 대학 4년이 지나서도 스스로의 선택을 유보한 채 “교수님, 졸업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고 묻는 학생들을 보면 답답하기만 하다고.
이 교수는 중고교 시절 많은 책을 통해 세상을 보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있는 시기에 책은 많은 것을 일깨워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 자신도 그랬다. 그는 학생들에게 20여 년 동안 알래스카를 취재한 야생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노의 ‘여행하는 나무’, 프랑스의 작가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부인’을 추천했다. 연애소설도 무협지도 좋다. 이 교수도 스탕달의 ‘적과흑’을 읽다가 일본만화 ‘크레용신짱’을 읽는다.
“‘자식들의 인생을 지켜보되 간섭하지 않는다’가 제 아버지의 철학이셨어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부모의 역할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돕는 것이죠. 부모의 역할은 ‘마이너스’가 더 좋아요. 스스로 틀을 깨는 것은 어렵지만 한번 아이에게 맡겨보세요. 그 친구(채린)도 선택한 길을 가니까 자신의 일에 끝까지 빠져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웃음)”
봉아름 기자 eri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