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보며 간섭 않기… 부모 역할은 ‘마이너스’가 좋아요”

입력 2010-03-16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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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선택 늘 존중”… 가수 씨엘의 아버지 이기진 교수

17일 오후 2시 서강대 리찌과학관 10층. 연구실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사람 키만한 로봇이었다. 둘러보니 보물섬 같았다. 구식 텔레비전, 할머니가 쓰셨을 법한 궤짝, 술병 모양의 백자 여러 점. 이곳은 고고학자도 사학자의 연구실도 아니다. 마이크로파 물리학을 전공한 서강대 물리학과 이기진 교수(50)의 방이다.

그는 물리학자이면서 동화작가다. 만화를 그리면서 고등학생을 위한 학교홍보물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쓴다. 프랑스, 일본, 아르메니아공화국, 러시아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두 딸을 위해 그림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이 교수를 설명하는 다채로운 수식어가 끝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교수의 큰 딸 채린 씨(19)는 인기 아이돌 그룹 2NE1의 리더이자 카리스마 있고 당찬 캐릭터로 인기가 높은 ‘씨엘’이다. 연구실만큼이나 이 교수의 자녀교육법은 자유롭고 특별했다.

최근 이 교수는 서강대학교SLP와 공동으로 초등생을 위한 영어사전인 ‘이미지 사전(프로젝트 409)’을 펴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권장하는 1300개의 초등 필수단어를 쉽게 이해하도록 그림으로 표현한 사전이다. 단어와 연관된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톡톡 튀는 일러스트는 전부 이 교수가 직접 그렸다.

이 교수의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깍까’는 가족과 함께 일본에서 생활할 때 탄생했다. 두 딸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기 위해 이 교수는 직접 깍까가 남극, 우주, 밀림으로 여행하는 모험기를 쓰고 스케치북에 그림으로 담았다. 동그란 얼굴에 발만 달린 깍까는 눈과 입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당시 두 딸이 “재미있다고 후딱 읽었던” 동화는 ‘박치기 깍까’라는 책으로 엮였다.

이 교수의 글과 그림은 단순하고 엉뚱하다. 그는 자신을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머리 위에 바나나를 올린 캐릭터로 표현한다. 50대 교수가 그린 그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롭고 유쾌하다. 그의 가족은 결혼 초 12년 동안 10회 이상 이사했다. 서울 마포, 대치동, 밤섬, 홍대 앞 전셋집을 옮겨 다녔다. 유학했던 프랑스와 일본에서도 각각 두 번씩 집을 옮겼다. 이 교수는 “새로운 동네, 새로운 환경에서 가족과 함께 ‘모험’하면서 발상을 전환하고 다양한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느낀 것과 생각한 것을 기록하는 습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간단한 기록일지라도 1년, 10년이 지나면 개인의 역사로 남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도 일상을 기록하도록 지도했다. 두 딸은 수첩에 극장표, 책을 구입한 영수증 등을 붙이고 하루 일과를 남겼다. 이 교수는 “생각을 표현하는 습관은 또 다른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출발이 된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한 아트 숍에 전시된 그의 로봇 작품은 10년 전 만들었던 깍까 캐릭터가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자녀가 어떤 요구를 해도 그 요구에 자녀의 진지함이 담겼다면 이 교수는 머뭇거림 없이 “오케이!”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큰 딸 채린이 재즈댄스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이 교수는 직접 학원을 수소문해 등록해줬다. 채린 씨가 학교의 기념 앨범을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땐 직접 인쇄소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만약에 아이가 빨간 모자와 파란 모자가 있을 때 뭘 살까를 고민하면 고민할 시간에 두 개를 다 사고 필요 없는 나머지 하나는 친구에게 선물하라고 조언한다”면서 “고민하고 머뭇거리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과연 이 교수는 가수가 되겠다는 딸의 의견에도 흔쾌히 ‘오케이’ 했을까?

“그 친구(이 교수는 큰딸 채린을 ‘친구’라고 표현했다)에게 가수가 최종 목표인지는 알 수 없어요. 인생을 완성해가는 과정이죠. 나중에 그 친구가 화가나 교수가 된다고 할 수도 있고 옷 장사를 하겠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정답은 없어요.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대신 재미있게 했으면 좋겠어요.”

이 교수는 두 딸이 평생 즐거운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건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연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탁월한 연구도 훌륭하지만 자신의 환경과 역량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은 연구라고 생각한다.

이 교수는 “자신의 일(공부)을 즐기기 위해선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모는 자녀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는 것. 이 교수는 “나도 20대 때부터 책을 쓰겠다고 다짐했지만 정작 40대가 되어서야 여러 권 책을 만든 것처럼 아이들도 때가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해낼 것”이라면서 “불안한 마음에 자녀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맞추려는 욕심과 고집을 버려야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고3 때까지 부모가 만들어놓은 길을 걷다가 대학 4년이 지나서도 스스로의 선택을 유보한 채 “교수님, 졸업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고 묻는 학생들을 보면 답답하기만 하다고.

이 교수는 중고교 시절 많은 책을 통해 세상을 보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있는 시기에 책은 많은 것을 일깨워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 자신도 그랬다. 그는 학생들에게 20여 년 동안 알래스카를 취재한 야생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노의 ‘여행하는 나무’, 프랑스의 작가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부인’을 추천했다. 연애소설도 무협지도 좋다. 이 교수도 스탕달의 ‘적과흑’을 읽다가 일본만화 ‘크레용신짱’을 읽는다.

“‘자식들의 인생을 지켜보되 간섭하지 않는다’가 제 아버지의 철학이셨어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부모의 역할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돕는 것이죠. 부모의 역할은 ‘마이너스’가 더 좋아요. 스스로 틀을 깨는 것은 어렵지만 한번 아이에게 맡겨보세요. 그 친구(채린)도 선택한 길을 가니까 자신의 일에 끝까지 빠져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웃음)”

봉아름 기자 eri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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