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로 데뷔한 셀린 송 감독(왼쪽)은 “이민자의 이야기는 전 세계에서 보편적인 소재가 됐다”고 말했다. 배우 유태오는 “내 아내인 니키 리는 내가 땅에 발붙이고 살 수 있게 해준, 나의 구원자다”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사진제공|CJ ENM
셀린 송 감독 “‘한국인 아이텐티티’를 담은 작품…한국 개봉이 가장 기대되는 이유”
배우 유태오 “‘평범한 한국남자역’ 걱정됐지만 첫사랑 그리워하는 마음은 같죠”
윤여정이 주연한 ‘미나리’에 이어 또다시 한국계 감독과 한국 배우가 의기투합한 할리우드 영화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송하영·36) 감독이 연출하고 유태오(42)가 주연한 ‘패스트 라이브즈’가 그 주인공이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남녀가 이민으로 헤어졌다가 20여 년 만에 미국 뉴욕에서 재회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최근 미국 각종 영화상을 휩쓴 데 이어 11일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라 오스카 트로피까지 겨냥하고 있다. ‘오스카 캠페인’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을 보내는 와중에도 6일 한국 개봉에 앞서 내한한 셀린 송 감독과 유태오는 “한국인의 아이덴티티를 담은 작품이니만큼 국내 개봉이 가장 기대된다”고 입을 모았다. 배우 유태오 “‘평범한 한국남자역’ 걱정됐지만 첫사랑 그리워하는 마음은 같죠”
●셀린 송 감독 “‘넘버3’ 만든 아버지…정말 행복해하세요”
셀린 송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열리는 미국 내 여러 시상식과 행사에 참석하며 크리스토퍼 놀란, 기예르모 델 토로 등 수많은 거장과 교류하며 꿈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들이 내 영화를 보고 ‘너무 좋았다’고 말해주는 데 믿을 수가 없다”며 밝게 웃었다.
“그런 훌륭한 감독님들은 늘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결국 중요한 건 영화 그 자체다’라는 말이죠. 흥행이나 시상식에서 상을 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이에요.”
데뷔작부터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송 감독의 행보를 가장 뿌듯해 하는 사람은 그에게 재능을 그대로 물려준 아버지 송능한 감독이다. 1997년 ‘넘버3’를 만든 송능한 감독은 1999년 ‘세기말’을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 이민했고, 셀린 송 감독은 어릴 적 겪었던 이민의 과정을 이번 영화에 그대로 녹였다. 극중 여주인공 노라(그레타 리)의 아버지의 직업도 영화감독으로 설정했다.
“아버지가 정말 행복해하시고 자랑스러워하세요. 아버지가 선배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험도 했죠. 이번 영화 촬영을 위해 2011년 한국에 와서 만난 조명 감독님이 저희 아버지의 (영화 관련)강의를 들었던 학생이었거든요. 한국서 만난 여러 스태프들이 여전히 아버지를 좋아하거나 존경하고 있었어요.”
극중 극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노라처럼 송 감독 역시 지난 10년간 뉴욕의 연극 업계에 몸담으며 극작가로 활동했다. 그러다 미국에 놀러온 어린 시절 친구, 미국인 남편과 뉴욕의 한 바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낸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제가 친구와 남편 사이에서 통역을 하며 대화를 했는데 두 언어와 문화뿐만 아니라 제 정체성과 역사까지 넘나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서울과 뉴욕을 오가는 이번 이야기의 각본을 쓰게 된 계기죠. 장소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작품이니만큼 연극이 아닌 영화로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했죠.”
송 감독이 영어와 한국어가 공존하는 영화를 만들 거라고 말할 때마다 미국 영화계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자막이 달린 영화를 보는 걸 꺼리는 미국 관객들의 특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뿐만 아니라 미국 영화계를 휩쓴 뒤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기생충’ 이후 자막을 문제 삼거나 걱정하는 반응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기생충’이 완전히 터닝 포인트가 됐죠.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이민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이런 이민자의 이야기가 아주 보편적인 이야기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찾고 있는 거 같아요.”
●배우 유태오 “‘인연’에 대한 스토리…최고 인연은 내 아내”
극중 이민 간 첫사랑 노라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향하는 해성을 연기한 유태오는 영화의 국내 개봉이 설레면서도 “무척이나 두렵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지극히 평범한 해성은 독일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연기를 공부한 자신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평범한 한국 남자를 표현해야 한다는 걱정이 있었던 게 사실이에요. 제 한국어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거든요. 하지만 감독님이 제 안에 무언가를 봤기 때문에 절 캐스팅 해주셨다고 생각하니 잘 해낼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삶의 방식은 달랐지만 해성이 느끼는 감정만큼은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여러 상황들로 인해 노라를 오랜 시간 멀리서 지켜봐야 했던 해성”과 “다국적 문화 속 교포로 살면서 변화시킬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경험했던 자신”과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군 경험은 없지만 극중 군 복무 장면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15살부터 21살까지 농구선수로 활동했기 때문에 단체생활에 익숙하다고 말했다.
“여름방학 때마다 한국에 가서 두 달 동안 한양대학교 선수들과 합숙훈련을 했어요. 1990년대 중후반 합숙훈련은 군대만큼 극단적이었을 거예요. 다짜고짜 욕설을 하거나 머리를 땅에 박게 하는 등 단체기합 받는데 독일에서 살아온 저에겐 문화충격이었어요. 그런데 그 안에서 팀원들과 동지애가 생기는 거예요. 그때의 경험을 연기를 할 때 투영했죠.”
이번 영화로 한국배우 최초로 영국 아카데미(BAFTA) 남우주연상 후보까지 오른 그는 수상엔 실패했지만 전혀 아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오히려 상을 받은 ‘오펜하이머’ 킬리언 머피에게 직접 축하 인사를 건넸던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거라며 웃었다.
“용기를 내서 축하한다고 말하니까 따뜻하게 포옹을 해주더라고요. 그러고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님 앞으로 데리고 가서 절 소개시켜주는 거예요! 놀런 감독님이 우리 영화를 너무 잘 봤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나중에 한국 배우가 필요할 때 절 꼭 오디션에 불러달라고 어필했죠. 하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번 영화를 통해 지난 인연에 대해서도 많이 떠올렸다. “살면서 만나온 모든 사람들과 작품이 모두 소중한 인연”이었다면서도 “가장 중요한 인연”은 아내인 니키 리라고 말했다. 11살 연상의 유명 사진작가인 니키 리는 2006년 결혼 이후 무명이 길었던 유태오의 곁을 한결같이 지켰다.
“어렸을 땐 서른다섯 이후 전 세상에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서른다섯 그 이후의 내 인생이 전혀 그려지지 않아서 세상에서 사라지려 했거든요. 그런데 니키가 저를 땅에 발붙이고 살 수 있게 해줬어요. 니키는 내 삶의 구원자예요.”
이승미 스포츠동아 기자 smle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