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린 바이올리니스트 이깃비 씨의 독주회를 다녀왔습니다.
프랑스 음악 스페셜리스트답게 포레, 프랑크, 쇼송으로 프로그램을 짰더군요. 독주회의 타이틀은 ‘Beau Reve(좋은 꿈)’입니다.
프랑스 클래식 음악은 굉장히 강한 개성을 갖고 있죠.
순전히 개인적인, 편견이라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만(사실이 그렇습니다) 프랑스 음악은 요리로 치면 재료들이 한데 어우러져 숙성된 깊은 맛을 내려하기보다는(독일음악이 그렇습니다) 각 재료들 본연의 맛이 뚜렷하게 살아있다고나 할지.
많은 사람들이 ‘색채감’이라 표현하는 그것. 확실히 전골보다는 샐러드.
그래서일까요. 프랑스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악기들이 싱싱한 야채처럼 파릇파릇 합니다. 큼직한 보울에 넣어 마구 뒤섞어 놔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성이 뚜렷하고 자유에 대한 욕구를 감추지 않는 프랑스 국민들 같기도 합니다.
이깃비 씨의 연주와 음색은 과연 프랑스 레퍼토리에 잘 어울리더군요. 프랑스 작곡가들 특유의 ‘지적인 나른함’이 잘 그려졌습니다. 그 왜 있잖아요.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데, 시험만 보면 성적 잘 나오는, 조금은 ‘나이스한 도련님’ 같은 친구.
1부의 첫 곡은 가브리엘 포레의 로망스 Op.28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포레가 30대 초반에 작곡했습니다.
이깃비 씨가 이 작품을 첫 곡으로 고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몽환적인 시작. 꿈길을 걷는 듯한 테마는 과연 이날 독주회의 타이틀 ‘좋은 꿈’과 더없이 잘 어울렸으니까요.
클래식 연주회에서 첫 곡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편입니다. 연주자도 잔뜩 긴장을 한 상태이고, 손과 감정 역시 덜 풀려 있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요. 세계적인 거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깃비 씨는 불펜에서 몸을 충분히 풀고 나온 투수처럼 곧바로 스트라이크를 꽂아 버립니다. 에피타이저 없이 메인요리가 덜컥 나왔습니다.
이깃비 씨는 솔리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세계 초일류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도 굉장히 유명한 연주자죠. 2018년 20대의 나이에 런던필의 제1 바이올린 수석으로 발탁돼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후 불과 2개월 만에 부악장으로도 활약하며 경험을 쌓았다죠. 유학했던 프랑스에서는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니, 파리오케스트라 등 프랑스 최고의 오케스트라에서 제1바이올린 객원수석으로 활동하기도 했고요.
이후에는 런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단원과 로열 스코틀랜드 국립오케스트라 공동악장으로 발탁되기도 했지요. 현재는 런던 필하모니아와 MOV 소속 연주자로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연주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유명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서 쌓은 풍부한 경험과 매너는 독주무대에서도 엿보였는데, 이게 또 재미있더라고요.
우선 연주할 때의 움직임과 표정이 상당히 절제되어 있습니다. 고음을 뽑아 올릴 때 몸짓이 커지는 연주자들이 많은데, 이깃비 씨는 오히려 허리를 더 꼿꼿이 세우고 견고한 자세를 유지하더군요. 그 상태에서 보잉이 자아내는 소리는 깔끔하고 풍성했습니다.
또 하나는 협주에서의 분위기입니다.
1부 포레의 로망스와 C.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는 피아노, 2부 E. 쇼송의 ‘바이올린, 피아노, 현악4중주를 위한 협주곡 Op.21’는 피아노, 콰르텟과 함께 했습니다.
이런 경우 ‘독주자+협연자’의 포지셔닝이 보통입니다만, 이깃비 씨의 연주회에서는 ‘독주자+독주자’ 혹은 ‘하나의 실내악단’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2부 쇼송에서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났는데요. 이깃비 씨는 독주자라기보다는 마치 콰르텟의 일원이자 리더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이깃비 씨가 ‘듣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는데요.
연주자는 악보를 꼼꼼히 연구해 작곡가의 목소리를 듣지요. 그리고 무대에서는 반주자의 소리를 듣습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 중 하나가 여기에 있죠. 아마추어는 자기 악기 소리를 듣는 데에 급급해 좀처럼 반주자의 소리를 듣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이깃비 씨는 여기에 듣고 있는 것이 하나 추가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로 관객입니다. 관객의 표정, 음악에 따라 변하는 호흡, 심장의 고동, 나지막한 탄식까지. 실제로 그가 이런 것들을 듣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객석에 앉아 있자니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 듣고 있구나.’
이처럼 다른 연주자들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려웠던 이깃비 씨의 특성은 분명 이날 연주회의 성공에 한몫을 차지했을 겁니다.
특히 2부 쇼송의 협주곡은 대단한 호연. 언제나 “그! 래! 요!”를 속으로 외치게 만드는 3연타의 1악장. 2악장의 시실리엔느는 바람에 흐드드 벚꽃이 날리는 길을 혼자 걷는 꿈같습니다. 혈관이 터져나갈 것 같은 4악장 피날레에 마침표가 찍히고 나서야 비로소 관객들은 1시간 30분 남짓 걸어온 길이 꿈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반가운 소식이 하나 더 있군요. 이날 독주회를 기념해 이깃비 씨의 음반도 나왔습니다. 한 장의 CD로 출시된 음반에는 독주회 프로그램인 포레의 로망스와 프랑크의 소나타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 일일공프로젝트는 ‘일주일에 한편은 공연을 보자’는 대국민 프로젝트입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M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