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표 해설위원이 스포츠동아와 인터뷰 직후 환하게 웃고 있다. 2014브라질월드컵에서 명쾌한 분석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이 위원은 9월 캐나다 밴쿠버로 출국한다. 스포츠 관련 이론을 배우며 한국축구에 기여할 방법을 모색할 계획이다. 최용석 기자 gtyong@donga.com 트위터@gtyong11
벨기에전 “월드컵은 실력 증명” 발언 이슈
명보 형님 존경하지만 해설가로서 정리
그때로 돌아간다해도 똑같은 말 했을 것
지도자? 음…일부러 자격증 안 땄어요
다른 길로 한국축구 도울 방법 찾을게요
한국축구의 레전드 이영표(37)는 2014브라질월드컵에서 해설위원으로 또 다른 명성을 쌓았다. 경기 결과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예측으로 많은 축구팬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스포츠동아는 월드컵을 마치고 국내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 해설위원을 만났다. 그는 브라질월드컵과 한국축구, 자신의 미래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점심식사로 카레라이스를 주문하면서 “고기는 빼고 주세요”라고 말할 정도로 은퇴 후에도 철저하게 몸 관리를 하고 있다. 그런 자기관리 덕분에 이 위원은 해설가로도 성공적인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 4번째 만에 제대로 맛 본 월드컵
선수로 3번의 월드컵 무대를 밟았던 이 위원에게 브라질월드컵은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선수로 뛸 때는 월드컵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선수로 참가한 월드컵에선 경기를 위해 자신의 컨디션 체크와 상대 분석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해설위원으로 변신해 다가선 월드컵은 전혀 다른 무대였다. 20경기 정도를 직접 해설하면서 월드컵이란 대회가 어떻게 진행되고, 방송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등 월드컵 전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위원은 “축구 전술적인 부분 외에도 월드컵 전체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여서 무척 좋았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부분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어 “월드컵을 현장에서 지켜봤더니 몸이 축구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앞으로의 세계축구 흐름이 어떻게 바뀔지 나도 정말 궁금하다”며 즐거워했다.
이 위원은 이번 월드컵에서 드러난 특징을 3가지 정도로 정리했다. 첫 번째는 낡은 전술로 분류됐던 스리백의 재발견이다. 그는 “팀 선수 구성과 상대팀에 따라 전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게 증명됐다. 칠레, 네덜란드, 멕시코, 코스타리카, 우루과이 등은 팀 성향에 따라 스리백 혹은 파이브백을 활용했다. 전술과 팀의 조화를 이룬 게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분석했다.
그가 주목한 또 한 가지 부분은 활동량이었다. 이 위원은 “월드컵에 참가한 전체 선수들 중 4강에 진출한 4개 국가에 소속된 9명의 선수가 경기당 평균 뛴 거리에서 상위권을 점령했다. 9명 중 5명은 독일선수들이다. 축구는 역시 많이 뛰는 팀이 이긴다는 걸 보여주는 데이터다”고 얘기했다.
그런 뒤 그는 독일의 월드컵 우승 원동력을 설명했다. 이 위원은 “점유율 축구의 몰락이고, 역습 축구의 부활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독일은 이 2가지를 동시에 구현해 우승이 가능했다”며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바이에른 뮌헨에 가져온 점유율 축구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펼치는 역습 축구가 조화를 이뤘다. 독일은 유일하게 둘 다 갖춘 팀이었다”고 평가했다.
● 힘들었던 한국의 조별리그 탈락과 못 다한 이야기
이 위원은 한국과 벨기에의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H조 최종전 직후 방송을 끝내고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는 방송이 끝난 이후에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한동안 자리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장면도 화제가 됐다.
이 위원은 “월드컵과 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실패했을 때의 느낌이 났다. 선수들만 아는 느낌이 있다. 정말 중요한 경기에서 패하면서 느끼는 패배감, 절망감이다. 마치 내가 실패한 것 같은 깊은 실망감이었다. 대표팀 선수들의 감정이 이입됐던 것 같다. 정말로 힘들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2006독일월드컵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스위스에게 패해 16강 진출이 좌절됐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직후 이 위원에게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얘기를 꺼냈다. 벨기에전 직후 축구대표팀 홍명보 전 감독은 TV 인터뷰에서 “선수들에게 좋은 경험이 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진 장면에서 이 위원은 “월드컵은 경험하는 자리가 아닌 실력을 증명하는 자리”라고 평했다. 이 말은 크게 이슈가 됐다.
이 위원은 “결과가 나오기 이전까지는 힘을 실어줘야 하지만, 월드컵 대장정이 끝났으니 해설자로서 정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난 ‘그게 맞다’고 봤다. (홍)명보 형님에 대해 존경심은 갖고 있지만, 개인적인 감정을 섞지 않고 아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판단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한국축구가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어디로, 얼마만큼 갈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봤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그는 “이번 월드컵의 책임은 선수, 감독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축구인 모두에게 있다. 해설자로서 평가해야 했지만, 나도 평가받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속엔 갈등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하지만 해설자로서 비슷한 상황이 또 온다면 같은 말을 했을 것 같다”고 당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음을 강조했다.
● 지도자 말고도 한국축구에 기여할 방법은 많다!
이 위원은 9월 초 캐나다 밴쿠버로 출국할 예정이다.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 밴쿠버 화이트 캡스 구단의 배려로 팀에 머물게 됐다. 그가 원하면 구단 행정을 근거리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밴쿠버 화이트 캡스가 제공하기로 했다. 스포츠 관련 이론을 제대로 배우기 위한 학업을 병행할 계획이다. 일부에선 ‘지도자 이영표’를 바라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내가 지도자 자격증을 따지 않았다”고 농을 던진 이 위원은 “몇몇 분이 지도자 얘기를 하시는데, 해설자는 시청자들에게 한 발 앞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사실 ‘가능성이 크다’ 정도의 말이었는데, 많이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고, 지도자의 덕목도 (해설자의 역할과는) 다르다고 본다”고 말했다.
좋은 지도자가 무슨 말을 해야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또 훌륭한 지도자가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지식은 갖고 있지만 지식과 행동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한국축구를 위해 지도자로 기여해달라고 끊임없이 요청해도 뿌리치겠느냐’고 묻자 이 위원은 “지도자가 아니어도 한국축구에 기여할 방법은 많다. 이를 위해 캐나다로 가서 공부를 하려는 것”이라고 자신이 정한 길로 흔들림 없이 갈 계획임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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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setupman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