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의 기적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 - 찰스슈와브컵 챔피언십 관전기 [윤영호의 ‘골프, 시선의 확장’] 〈17〉

입력 2024-11-12 15: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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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르트 랑거가 11일(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피닉스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PGA 투어 챔피언스 플레이오프 찰스슈와브컵 챔피언십에서 마지막 홀에서 장거리 퍼팅을 집어넣고 환호하고 있다. 사진제공 ㅣPGA투어

베른하르트 랑거가 11일(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피닉스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PGA 투어 챔피언스 플레이오프 찰스슈와브컵 챔피언십에서 마지막 홀에서 장거리 퍼팅을 집어넣고 환호하고 있다. 사진제공 ㅣPGA투어



손에 땀을 쥐고 어느 선수를 응원한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골프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선수 중 한명을 가여운 심정으로 응원할 줄은 몰랐다. 베른하르트 랑거(독일)를 진심으로 응원한 것은 그에게서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며, 나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PGA투어 챔피언스는 자격을 갖춘 50세 이상의 프로 골퍼가 참여하는 대회다. 올해로 18년째 참가하는 랑거는 11번 상금왕에 올랐고, 올해를 제외하고 매년 한 번 이상의 우승을 거두었고, 이미 46승을 달성한 상태였다.

랑거는 10일(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피닉스 컨트리클럽(파71)에서 열린 PGA 투어 챔피언스 플레이오프 찰스 슈와브컵 챔피언십(총상금 300만달러) 3라운드에서 스튜어트 싱크(미국)와 같은 조였다. 51세의 싱크가 340야드 드라이버 샷을 날릴 때, 67세의 랑거는 265야드를 보냈다. 그러나 높은 페어웨이 적중률과 퍼팅 정확도를 앞세운 랑거는 67타를, 싱크는 75타를 쳤다.

시니어 투어의 주축 선수는 싱크처럼 50대 초반이다. 최경주와 양용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PGA투어 선수 못지않은 장타를 자랑한다.

4라운드를 시작할 때 랑거는 한 타 차 선두였다. 같은 조에서 랑거를 추격할 스티븐 알커(뉴질랜드)는 53세로 올 한해 꾸준히 좋은 성적을 냈다. 시니어 대회가 보통 3라운드 경기를 펼치는데, 투어 최종전인 찰스슈와브컵은 4라운드 경기이기 때문에 랑거에게는 부담이되었다.

랑거는 첫 네 홀에서 연속 버디를 기록하며 다섯 타 차이로 앞서갔다. 예상 밖의 선전이었지만, 그의 체력을 고려할 때 경기 후반부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10번 홀에서 보기를 기록한 랑거는 11번 홀에서 짧은 파 퍼팅을 놓치며 보기를 범했다. 2위와의 차이가 2타로 좁혀졌다. 퍼팅 입스로 고생한 그였기에 짧은 퍼팅 미스가 타격이 될 것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절뚝였지만 침착하게 걸어가 퍼터를 골프백에 집어넣고 드라이버를 꺼냈다. 장타 후에 당당하게 피니쉬를 잡고 있는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랑거는 스윙 후에 구부정한 자세로 날아가는 공을 보았다. 그 모습은 어정쩡한 자세로 방죽에 낚싯대를 던지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연상시켰다. 홀이 거듭될수록 그는 힘들어 보였다.

17번 홀에서 그의 드라이버 샷이 러프로 갔고, 세컨샷이 나무에 맞고 튕겨 나왔다. 랑거가 보기를 범하는 사이에 알커가 버디를 기록하며, 두 선수는 17언더파로 동타가 되었다. 안타까운 모습으로 그 광경을 보던 관중과 시청자는 경기가 사실상 끝났음을 직감했다. 랑거에게 결기가 남아 있었을 것이나, 결기는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은 허공을 응시하는 쇠약해진 아버지 같았고, 내 모습의 미리보기 같았다. 서글펐기에 그가 끝까지 싸우기를 바랐다. ‘골프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 상투적 표현이 아니기를 바랐다.

18번 홀은 파5로 장타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알커의 티샷은 벙커에 떨어졌지만, 행운의 바운스로 벙커에서 나와 페어웨이에 안착했다. 랑거의 티샷은 다시 러프로 갔고, 레이업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알커의 세컨샷은 잘 맞아 그린을 넘어갔지만, 어프로치로 버디 찬스를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랑거의 세 번째 샷은 핀을 13걸음 정도 지나 멈췄다. 장정 기준으로 13걸음이지 랑거의 걸음으로는 20걸음도 넘어 보였다.

랑거에게 다가간 캐디는 “한 번만 더 좋은 퍼팅을 보여줘요!”라고 말했다. 랑거의 퍼팅은 너무 왼쪽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핀 가까이에서 크게 휘어지며 거짓말처럼 홀컵에 빨려 들어갔다. ‘골프에서는 어떤 것도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은 공허한 위로가 아닌 기적의 묘약이었다. 랑거는 두손을 번쩍 들어 환호하고, 모자를 벗어 그린 위에 던지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행동은 ‘덕분에 다 이루게 되었다’는 감사의 표시처럼 보였다.
베른하르트 랑거(왼쪽)는 시니어 투어 최종전을 우승했고, 스티븐 알커는 누적 포인트 1위로 대상을 차지했다. 사진제공 ㅣPGA투어

베른하르트 랑거(왼쪽)는 시니어 투어 최종전을 우승했고, 스티븐 알커는 누적 포인트 1위로 대상을 차지했다. 사진제공 ㅣPGA투어


알커의 버디 퍼팅이 남은 상태였다. 네걸음 거리에서 친 그의 퍼팅은 힘없이 굴러가서 홀컵 앞에서 멈췄다. 알커는 경기가 끝난 후에 랑거를 두손으로 가리키며 관중들의 박수를 유도했다. 랑거의 플레이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랑거는 17년간 이어진 승리 기록을 18년 차에서도 극적으로 이어갔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69-64-67-66타를 쳤다. 67세의 그는 3일 연속 에이지 슈팅(자신의 나이와 같거나 적은 타수를 치는 것)을 기록했다. 현역 선수 중 누구도 이러한 기록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다.

윤영호 골프 칼럼니스트

윤영호 ㅣ 서울대 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증권·보험·자산운용사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했다. 2018년부터 런던에 살면서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옵션투자바이블’ ‘유라시아 골든 허브’ ‘그러니까 영국’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등이 있다. 런던골프클럽의 멤버이며, ‘주간조선’ 등에 골프 칼럼을 연재했다. 현재 골프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이다.


연제호 기자 sol@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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