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 본 AG] 강렬했던 北 미녀응원단…만경봉호 앞엔 청년들 북적

입력 2014-09-24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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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열기의 한일월드컵 바통을 이어받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은 남북 화해무드 속에서 열렸다. 특히 북한 미녀응원단은 아시아의 축제를 더욱 오래도록 기억하게 해 준 주인공이었다. 130명의 예술단원과 150명의 악단으로 구성된 20대 초반의 북한 미녀응원단은 가는 곳마다 화제를 모아 2002부산아시안게임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스포츠동아DB

뜨거운 열기의 한일월드컵 바통을 이어받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은 남북 화해무드 속에서 열렸다. 특히 북한 미녀응원단은 아시아의 축제를 더욱 오래도록 기억하게 해 준 주인공이었다. 130명의 예술단원과 150명의 악단으로 구성된 20대 초반의 북한 미녀응원단은 가는 곳마다 화제를 모아 2002부산아시안게임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스포츠동아DB

■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의 추억

130명 예술단원·150명 악단 구성한 20대 미녀들
절도있는 매스게임·흥겨운 노래…가는 곳마다 화제
성화 최종주자는 남남북녀 유도영웅 하형주·계순희
男농구, 야오밍의 중국 꺾고 ‘20년만의 금’ 감동도

2002년 대한민국에는 두 개의 커다란 축제가 열렸다. 국민들은 엄청난 열정을 분출하며 하나로 뭉쳤다. 한일월드컵의 길거리 응원은 그동안 억눌려왔던 우리의 축제본능이 이처럼 격렬했는지 되묻게 만들었다. 리오카니발 못지않은 열기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두가 ‘붉은악마’가 됐던 2002년의 봄을 즐겼던 사람들은 그해 가을 부산에서 벌어진 제14회 아시안게임 때 또 다른 열기에 휩싸였다.

남북 화해무드와 북한 미녀응원단의 바람은 강렬했다. 신기루처럼 오래가지 못해 더 인상적이었다. 햇볕정책을 앞세웠던 김대중정부의 마지막 해. 남과 북은 가까웠다. 월드컵 폐막 전날인 6월 29일 서해해상에서는 남북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6명의 대한민국 군인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북한과의 화해무드는 변함이 없었다. 8월 30일 경의선 동해선의 철도 및 도로의 연결 착공과 관련해 8개 항목에서 합의를 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도 있었다. 비무장지대(DMZ)에 군사용 핫라인도 개통됐다.

마침내 9월 23일 북한 선수단이 제14회 아시안게임 참가를 위해 고려항공 비행기를 타고 평양에서 김해로 직접 날아왔다. 그러나 부산아시안게임을 영원히 기억나게 만든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만경봉호를 타고 원산에서 출발해 부산 다대포항에 도착한 북한의 미녀응원단이었다.

● 대회 유치경쟁 막후 스토리

아시안게임 역사상 처음으로 유치도시를 놓고 경선이 벌어졌다. 이전까지는 후보지를 신청했다가 세가 불리하면 스스로 물러나 만장일치로 유치도시가 결정됐다. 21세기를 여는 첫 대회는 두 도시가 물러서지 않았다. 부산은 대만(중화민국)의 가오슝과 힘든 경쟁을 했다. 중국에 밀려 국제사회에서 고립무원의 위치에 처했던 대만의 가오슝은 적극적이었다. 1000만 달러의 발전기금을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에 내놓겠다고 했다. 선수단 전원 무료숙박 등의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대만의 리덩후이 총재가 직접 이를 보증했다.

부산도 1200만 달러의 발전기금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가오슝의 총력전에 밀리는 상황이었다. 부산을 살려준 나라는 중국이었다. ‘원 차이나’를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삼는 중국으로서는 가오슝이 대회를 유치하면 불참하겠다면서 압박을 넣었다. 중국은 막판에 숨겨든 카드를 들이밀었다. 파키스탄을 통해서 개최지 최종선정 때 거수투표를 하자고 요구했다. 비밀투표 대신 공개투표를 하면 중국의 입김을 받는 나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고단수 전략이었다. 결국 41개 참가국 가운데 부산이 37표를 얻었다.


● 가까워진 남북 다양한 이벤트를 만들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을 단 하나의 이미지로 정리한다면 바로 북한의 응원단이다. 130명의 예술단원과 150명의 악단으로 구성된 20대 초반의 미녀응원단은 가는 곳마다 화제를 모았다. 통제를 위해 숙소로 사용한 만경봉호가 머무른 다대포항에는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응원단이 부산을 떠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작별인사를 했다. TV 중계도 했다. 절도 있는 동작과 다양한 매스게임, 흥겨운 노래로 응원을 하는 응원단에 선수들이 치였다.

성화는 백두산 천지, 한라산 백록담에서 채화돼 임진각에서 합쳐졌다. 성화 최종주자도 남남북녀였다. 남북의 유도 영웅 하형주와 계순희가 주인공이었다. 전쟁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겠지만 건국 이후 처음으로 부산에서 인공기가 나부꼈다. 10월 1일 북한 여자역도 이성희의 금메달 시상식 때 북한의 국가가 연주됐다. 북한이 대회에 참가하면서 아시안게임 사상 처음으로 OCA 소속 54개 국가가 모두 참가했다. 총 참가 인원은 44개국 8887명이었다.


● 남자농구-남자배구-야구 등 주요종목 금 금 금

9월 29일부터 10월 14일까지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창원 마산 울산 양산에서도 경기가 벌어졌다. 마스코트는 갈매기를 상징한 두리아였다. ‘영원한 아시아’란 뜻과 ‘둘이 함께’라는 의미를 담았다. 북한은 18개 종목 316명(선수 184명, 임원 132명)을 파견했다. 한국은 37개 종목 1007명(선수 769명, 임원 238명)이 참가했다. 한국은 역대 최고성적인 96개의 금메달, 80개의 은메달, 84개의 동메달을 땄다. 1위 중국은 금메달 150개, 은메달 84개, 동메달 74개였다. 9위 북한은 금메달 9개, 은메달 11개, 동메달 13개였다. 한국은 구기 종목에서 극적인 경기를 많이 했다.

남자농구는 야오밍이 버티는 중국을 상대로 경기 종료 1분전까지 8점 차로 뒤졌지만 기어코 동점을 만들어 낸 뒤 연장에서 102-100으로 이겼다. 20년 만의 금메달이었다. 필리핀과의 준결승전에서도 이상민의 3점 버저비터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신치용 감독이 이끄는 남자배구도 이란을 이기고 금메달을 땄다. 김인식 감독은 야구대표팀을 지휘하며 대만을 꺾고 금메달을 안겼다. 2002월드컵 4강신화를 썼던 남자축구는 준결승전에서 이란에 승부차기로 패하면서 동메달에 머물렀다. 대회 MVP는 일본의 수영스타 기타지마 고스케(100m 200m 평영, 400m 혼계영 금메달)였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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