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그때 이런 일이] 김희갑 폭행한 임화수 사형…연예계 ‘검은세력’

입력 2010-12-2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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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배우 김희갑. 스포츠동아DB

원로배우 김희갑. 스포츠동아DB

한때 연예계에 스며든 ‘검은 세력’으로 주먹패들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곤 했다. 주먹패들의 연예계 ‘침투’는 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1961년 오늘 오후, 이른바 ‘정치깡패’로 불린 임화수가 서울 서대문 서울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와 관련해 이듬해 11월 초 군사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서울 동대문 지역을 거점으로 장악하고 있던 임화수는 이른바 ‘합죽이 폭행 사건’으로 더욱 악명을 떨쳤다. 1959년 11월27일. 배우로 활약하며 당대 인기를 누리고 있던 ‘합죽이’란 애칭의 김희갑이 임화수가 단장으로 있던 서울 충무로 반공예술단 사무실을 찾았다. 김희갑은 자신의 양해없이 공연에 출연한다는 광고가 나간 것에 대해 임화수에게 항의했다. 그에 앞서 구봉서, 곽규석, 양훈, 양석천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에 출연하라는 강요를 받기도 했다고 김희갑은 훗날 털어놓기도 했다.

당시 권력의 비호 아래 영화계와 연예계를 장악하고 있던 임화수는 김희갑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주먹과 발길질로 응답했다. 결국 김희갑은 갈비뼈가 세 대나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인근 백병원에 입원했다.

이 사건에 대한 경찰의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결국 김희갑이 언론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임화수는 경찰에 입건됐다. 하지만 임화수는 그해 12월 벌금 3만환의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오히려 그 사건 이후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임화수의 횡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60년 4월18일 고려대생들이 서울 종로 거리에서 시위를 마치고 귀가를 하던 길. 깡패들이 이들 시위대에 달려들어 기습 폭력을 자행했다. 임화수와 유지광은 이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구속됐고 결국 형장의 이슬이 됐다.

3년 뒤인 1963년 11월, 김희갑은 영화 촬영 도중 세트 마루가 무너지면서 부상을 당했다. 임화수로부터 폭행당해 부러진 늑골을 다시 다쳤고 김희갑은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1960년 11월 임화수가 사형을 선고받은 뒤 동아일보는 “김희갑이 4·19 바로 그날, 파도 같이 밀려드는 ‘데모’ 학생들을 보면서 벅찬 감격으로 자꾸만 눈물을 쏟았고 그 다음날 백병원을 찾아가 의연금과 사과를 전달했다”고 전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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