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김건우 “운명 바꾼 교통사고…그래도 조기은퇴 지금도 아쉽다”

입력 2012-11-2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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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우는 MBC와 LG에서 투타에 걸쳐 고교야구 최고 스타다운 기량을 뽐냈으나 불의의 사고와 부상으로 큰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1997시즌을 끝으로 완전 은퇴한 김건우가 자신이 운영하는 리틀야구교실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큰 사진). 김건우는 1986년 투수로 신인 최다승을 거뒀지만(작은 사진 위쪽), 뺑소니차에 치이는 교통사고 후 타자로 변신하기도 했다.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 스포츠동아DB

투타 겸비 고교야구 최고스타
프로 무대서도 에이스로 펄펄
뺑소니차 치여 병원서 4개월

재활후 복귀했지만 구위 실종
타자 전향후엔 잦은 부상 시름
31세 젊은나이에 유니폼 벗어

“나같은 불행한 선수 막기위해
18년간 선수멘탈 치료 연구중”

스무 살 이전 정상에 있었다. 고교야구의 마지막 스타. 1981년 제1회 세계청소년대회 첫 우승의 주역. 프로야구도 쉬웠다. 1986년 신인 최다승을 거뒀다. 18승. 그러나 1987년 9월 13일 그 사건 이후 인생이 달라졌다.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로 달려든 뺑소니차에 치여 두 팔과 오른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대수술을 받고 4개월간 병원에 입원한 뒤 피눈물 나는 재활 끝에 마운드에 섰다. 597일만의 승리가 준 기쁨은 짧았다. 타자로 변신했다. 잦은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31세의 나이에 유니폼을 벗었다. 그 뒤 “다시는 나 같은 비극적 선수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18년간 선수의 멘탈을 연구하고 글을 써왔다.” MBC 청룡의 28번. 현재 서울 강동구에서 리틀야구 교실을 운영하는 김건우(49)다.


○마지막 남은 한 자루 배트가 인생을 바꾸다!

1986년 MBC에 입단했다. 계약금은 2500만원. 신혼집으로 생각하고 서울 명일동에 18평 아파트를 장만했다. 고교 동기동창이자 라이벌 박노준은 OB와 입단계약을 미루고 있었다. MBC는 “노준이도 이 액수에 한다”고 설득했다. 김건우는 “만일 상황이 달라지면 보상해달라”고 요청했다.

배트 10자루를 들고 MBC의 훈련에 참가했다. 처음 써보는 나무배트. 훈련을 하다보니 모조리 부러졌다. 자기 돈으로 배트를 사서 훈련할 때였다. 선배 김재박과 이광은이 한 자루씩 줬다. 그마저도 한 자루밖에 남지 않았을 때 3루서 1루로 강한 송구를 하는 그의 어깨를 미즈타니 코치가 탐냈다. 고(故) 김동엽 감독이 불렀다. “너 투수하지 않을래?” 1986년 시즌 개막을 한 달 반 남겼을 때였다. 내심 투수에 대한 매력을 갖고 있던 터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배트를 버리고 마운드에 올랐다.

데뷔전은 3월 30일 롯데와의 원정경기. 1-3으로 뒤진 경기에 패전처리로 나서서 2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다. 4월 3일. 잠실 홈 개막전. 모처럼 서울로 돌아온 뒤라 친구들과 전날 술도 한 잔 한 뒤였다. MBC 선발투수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경기 시작 1시간30분 전. 그라운드에서 개막행사를 보고 있는데 감독이 찾았다. “자식, 잘 잤어? 신인이라 긴장할까봐 통고 안했어. 선발이야”라고 말했다. 얼떨떨한 상태서 마운드에 올랐다. “던지라면 던진다”는 배짱만 있었다. 상대는 청보 핀토스. 2-0 완봉승. 7회 김정수에게 안타 하나만 허용했다. 질풍노도 같았다. 시즌 18승을 거두고 신인왕이 되자 MBC는 계약금 2000만원을 추가로 줬다. 조광식 단장은 김건우와 협상 때 했던 구두약속을 지켰다.


○던지면서 배운 피칭 요령

김건우의 피칭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1986년 4월 30일 빙그레를 상대로 또 1안타 경기를 했다. 겁 없이 던졌다. 내야수비도 도움이 됐다. 김상훈∼김인식∼김재박∼이광은이 어지간한 공은 다 잡아냈다. 여기에 마무리는 김용수. 던지다보니 요령도 늘었다. “처음에는 컨트롤이 엉망이었다. 밸런스가 맞지 않아 포수가 요구하는 반대로 공이 갔다. 그래서 한가운데를 보고 던졌다. 차츰 컨트롤이 잡혔다. 직구와 슬라이더, 두 구종밖에 없었다. 대신 슬라이더는 두 종류를 던졌다. 하나는 카운트를 잡고, 다른 하나는 투 스트라이크에서 삼진을 잡는 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슬러브와 커터였다. 직구는 묵직했다.”

1987년 한계에 직면했다. 1986년 229.1이닝을 던지면서 쌓인 피로 때문에 직구의 스피드가 줄어들자 타자들의 공격이 강해졌다. 과거보다 쉽게 승리를 따내지 못했다. 새로운 공이 필요했다.해태 차동철이 해답을 줬다. 잠실 해태전을 앞두고 차동철과 술 한 잔을 했다. ‘SF볼 던지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졸랐다. 차동철은 포크볼 그립을 넘겨줬다. 영업비밀을 소주 한 잔으로 건네줄 정도로 아날로그 시대의 우정은 순수했다. 다음날 불펜 피칭에서 새 구종을 연습했다. 이틀 뒤 해태전에 등판했다. 고비에서 김봉연이 타석에 들어섰다. 용감하게 새 공을 던졌다. 헛스윙. “김봉연 선배가 ‘이게 무슨 마구지’ 하는 표정이었다. 한가운데서 포수 무릎 아래로 정확히 떨어지는 포크볼.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공이다.” 그러나 새로운 마구를 장착한 김건우가 희망의 꿈을 꾸는 순간, 비극이 찾아왔다.


○1987년 9월 13일 MBC의 운명을 바꾼 교통사고

MBC는 해태, OB와 포스트시즌 진출을 다퉜다. 유리했다. 원정을 떠나면서 홈경기에 대비해 김건우를 서울에 남겨뒀다. 서울 대치동의 여자친구(지금의 아내) 집 앞에서 귀가하려고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때였다. “택시를 타려고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차가 달려들었다. 보지도 못했다.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내 몸이 공중에 떴다. 본네트 위로 올라가서 20m를 날아간 뒤 떨어졌다. 여자친구도 차에 치였다. 다행히 발가락 하나만 다쳤다. 나는 두 팔과 오른발이 부러졌다. 피를 흘리면서도 여자친구에게 기어가 괜찮으냐고 물어보고 일으켜 세운 뒤 기절했다.”

대수술이었다. 10명이 넘는 사람과 길을 건너던 중이라 목격자는 많았다. 그 운전자는 뺑소니를 쳤다. 택시가 쫓아가자 차에서 내려 달아났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4개월간 김건우가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MBC의 꿈은 사라졌다. 그에게도 다른 인생이 기다렸다. 가해자는 다음날 경찰에 자수했다. 구속 수감됐다. “피해보상도 없었다. 당구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얼굴도 못 봤다. 그 사람도 영원히 마음에 빚을 지고 살지 않을까 한다.” 힘든 재활을 거친 뒤 마운드로 돌아왔지만, 공은 예전 같지 않았다. 하루 던지면 사흘씩 통증이 왔다. 다시 배트를 쥐었다.


○타자로 전업, 아쉬운 은퇴

1992년 타자로 변신했다. 누구보다 타구를 멀리 쳤고 강했다. 자신도 있었다. 한동안 최다안타 부문 1위를 달렸다. 그러다 부상을 당했다. 태평양전에서 김재박의 트릭수비에 속아서 슬라이딩을 하다 무릎인대를 다쳤다. 한달 쉬고 복귀한 뒤에는 빙그레 장종훈과 충돌해 왼 손목 골절상을 입었다. 1994년을 앞두고 동계훈련을 하던 중 오른 손등에 피로골절이 찾아왔다. 정신력에 한계가 왔다. 31세 때였다. 구단의 권유로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지도자로 활동했다. 한때는 야구 이외의 사업에도 손을 댔다. 그 때마다 결과는 나빴다. 항상 머릿속에 야구가 남아 있다보니 잘 될 리 없었다. 야구로 돌아와 지금은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는 재미에 빠졌다.

“지금의 의학기술이었다면 첫 번째 부상을 당했을 때, 제대로 치료를 받고 재활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못한 것이 아쉽다. 두 번째로 아쉬운 것은 너무 빨리 은퇴한 것이다. 야수로서는 기회가 있었는데 포기가 일렀다. 몇 달을 더 쉬면서라도 선수생활을 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봤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불행한 선수다.”

그런 아쉬움을 잊기 위해 유니폼을 벗은 뒤부터 18년간 야구와 관련된 글을 써왔다. 기술보다 더 중요한 선수들의 심리에 관한 연구를 많이 했다. 관련 자격증도 땄다. 투수와 타자의 동작을 보면서 심리를 분석해 글을 썼던 것이 어느덧 2권으로 정리가 됐다. 조만간 정식으로 출판할 예정이다. “지금 선수들은 부상 이후 재활에 신경을 쓰지만, 중요한 것은 신체적 재활뿐 아니라 심리적 재활이다. 마음이 제대로 완치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기에 나가는 선수가 많다. 그들의 아픈 마음을 치료하고 싶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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