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김영덕 감독 “원년챔프와 맞바꾼 박철순의 허리…내가 못할짓 했어”

입력 2013-02-0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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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 우승 감독, 역대 사령탑 페넌트레이스 최고 승률 ….’ 11년간 OB∼삼성∼빙그레 사령탑을 맡아 우승 2번과 준우승 6번을 일궈낸 명장 김영덕 전 감독이 환하게 웃고 있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

OB 시절 박철순(뒤)의 야구열정은 김영덕 전 감독도 말리지 못했다. 2011년 4월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산(OB) 구단 3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박철순이 김 감독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다. 스포츠동아DB

11년 동안 OB∼삼성∼빙그레 사령탑

2번 우승·6번 준우승 전설의 명감독

82년 KS때 허리도 잘 못펴던 박철순
승합차서 몰래 마취주사 맞으며 등판
6차전 말렸어야 했는데…다 내 탓이야

83년 구단과 불화…결국 전격 삼성행
김성근과의 앙금? 다 지난 일인걸…


프로야구에서 김영덕(77)이라는 이름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원년 우승 감독, 한국시리즈를 없애버린 사령탑, 역대 사령탑 페넌트레이스 최고 승률…. OB∼삼성∼빙그레를 이끈 11년 동안 마술처럼 시즌을 운영하며 2번의 우승과 6번의 준우승을 했다. 명감독이다. 그러나 투수 혹사, 기록 조작, 져주기 등으로 비난도 받았다. 그 가운데 일부에는 책임도 있지만, 어떤 것은 오해였고, 어떤 것은 근거도 없었다. 재일교포 출신에게 가해진 따돌림일지도 모른다. 빙그레 감독에서 물러난 지 어느덧 20년. 그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삼성, 빙그레에서 우승을 못한 것은 내 책임”이라며 여전히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대중에게 알려진 것보다 김영덕은 훨씬 더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김영덕이 기억하는 OB 베어스의 탄생


1982년 프로야구가 탄생했다. 김영덕은 영입 1순위였다.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OB였다. “최인철 대한야구협회장이 주선을 해줬다. 천안북일고 감독으로 있었는데, 서울로 올라와서 OB와 만나라고 했다. 두산 박용곤 구단주와 면담을 했다. 사무실에서 먼저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같이 하시겠습니까’라고 한마디를 했다. 구단주가 내 관상을 본 모양이었다.”

OB 창단 감독 김영덕은 코칭스태프를 구성했다. 당초 구상했던 코치진은 조창수(광주일고 감독)와 강병철(동아대 감독)이었다. 조창수는 김동엽(작고)의 요청으로 해태 코치가 됐다. 강병철은 동아대와 계약문제로 움직이지 못했다. 한일은행 감독 시절 일본에서 데려왔던 재일동포 김호중(한국화장품 총감독)의 영입도 고려했으나 불발로 끝났다. 결국 김성근(신일고 감독)과 이광환(중앙고 감독)을 택했다.

선수도 선발했다. 대전·충청 연고선수를 우선으로 했으나 턱없이 모자랐다. 한국야구위원회(KBO)와 협의해 서울 연고 선수를 MBC와 2대1로 나누기로 했다. “우선권을 쥔 MBC가 김재박을 먼저 찍었다. 나는 박철순을 선택했다. 실력은 정확히 모르지만 미국에서 더블A까지 뛴 선수라면 능력이 있을 것으로 봤다. 야구는 투수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프로야구의 운명을 바꾼 선택은 또 있었다. “윤동균과 김우열은 나이가 들어 뽑지 않으려고 했다. 인원이 모자라 나중에 뽑았는데 결국 그 선택이 성공했다. 두 베테랑이 원년에 팀의 중심을 잡고 잘해줬다.”


○1982년 OB 베어스 신화를 쓰다!

마산에 스프링캠프를 차렸다. 훈련을 독하게 시켰다. 김영덕이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8년간 선수로 뛰며 경험했던 훈련을 도입했다. “나도 훈련을 많이 시켰지만, 김성근도 있었다. 힘든 훈련이었는데 윤동균의 리더십이 좋았다. 김우열과 함께 앞장서서 훈련을 따라와줬다.”

김영덕은 프로 원년 히트상품을 하나 개발했다. ‘학다리’ 1루수 신경식이었다. “몸이 유연하고 키가 컸다. 난카이 시절 1루수 가운데 다리를 쭉 뻗어 공을 받는 선수가 있었다. 그 것을 기억하고 신경식에게 그 훈련을 시켰다.”

OB는 초반 고전했다. 박철순 때문이었다. 에이스가 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상했다. 시즌 초반만 해도 ‘이게 아닌데’라는 판단이 나올 정도였다. 김성근과 ‘트리플A에 들어갔다는 선수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라고 얘기했다.”

박철순은 3월 28일 MBC와의 데뷔전이자 팀의 첫 경기에서 4안타 2실점(1자책)하며 9-2 완투승을 거뒀다. 그러나 4월 4일 MBC전과 4월 7일 삼성전에서 연거푸 패전투수가 됐다. 1승2패로 불안하게 출발한 박철순은 이후 전혀 다른 투수가 됐다. 4월 10일 해태전 3이닝 1안타 무실점 구원승을 거두더니 4월에만 5승2패1세이브. 5월 2일 삼성전 연장 10회 완투승 등 5월에 7연승, 2세이브를 따냈고, 6월 26일 전기리그 마감 때까지 6승을 추가해 18승2패3세이브를 기록했다. 8월 15일 동대문에서 MBC를 3-1로 꺾고 19연승이자 꿈의 20승을 달성했다. 9월 18일 롯데전 4-1 완투승으로 단일시즌 최다연승인 22연승(7세이브)을 기록했다. 박철순의 연승신화는 9월 22일 잠실에서 열린 롯데와의 더블헤더 제1경기에서 멈췄다. 서울 관중을 위한 특별경기로 롯데의 홈경기였다. 박철순은 제2경기에 선발 등판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7회까지 0-3으로 뒤지던 팀이 동점을 만든 뒤 9회말 1사 1루가 되자 투입됐다. 박철순은 1루주자 권두조를 견제구로 낚아 위기를 넘겼으나 연장 10회 실점하고 패전투수가 됐다. 이후 1승1패를 추가해 정규시즌 24승4패7세이브, 방어율 1.84를 기록했다. 13완투승, 9구원승이었다.

김영덕 전 감독의 손가락에는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반지가 빛나고 있다. 두산이 2011년 4월 창단 30주년을 맞아 김 전 감독을 비롯한 OB의 레전드들에게 특별 제작해 수여한 반지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




○1982년 한국시리즈는 만들어진 역사

OB는 후기리그 우승도 노렸다. 9월 29일 삼성과의 시즌 최종전. 대구 원정경기에서 사단이 났다. 밤 10시30분이 넘어갈 때까지 무승부였다. 관례대로라면 새 이닝으로 넘어가지 않고 무승부. OB는 다음 상대 MBC를 이기면 후기리그 우승도 차지할 판이었다. KBO가 원하지 않던 일이었다. KBO는 그 경기를 끝장승부로 진행했다. OB에서 항의했지만 결정이 번복되지 않았다. 그날 박철순은 삼성 손상대의 기습번트를 수비하다 하리를 다쳤다. 연장 12회 끝내기안타를 맞고 졌다. 결국 삼성이 후기리그 우승으로 OB의 한국시리즈 파트너가 됐다.

한국시리즈가 벌어졌다. OB는 1무1패로 몰렸다. 박철순의 공백이 컸다. 10월 8일 동대문 3차전. 박철순이 합류했다. 진통제 주사를 맞고 나가겠다고 했다. 김영덕은 말렸다. 원년 우승을 향한 욕심, 에이스의 책임감 등으로 박철순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구장 앞에 대기하던 승합차에서 주사를 맞았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오너 가족이 직접 나섰다. 매니저 구경백은 밖에서 망을 봤다. 박철순은 3·4차전에 구원 등판해 승리를 지켜냈다. 10월 10일 5차전을 앞두고 김성근 투수코치가 김영덕 감독을 찾았다. 불펜피칭을 하는 박철순의 상태가 괜찮은지 봐달라는 것이었다. “한 눈에 봐도 아니었다.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했다. ‘오늘은 안돼’라고 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우승이었다. 프로야구 원년 중하위권에 머물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깬 OB 선수들이 우승컵을 끌고 그라운드를 돌고 있다. 스포츠동아DB




○1982년 한국시리즈 6차전과 박철순을 기억하다!

10월 12일 동대문에서 6차전이 벌어졌다. 박철순과 이선희가 선발로 완투대결을 했다. 박철순은 주사를 계속 맞았다. OB는 3-3으로 팽팽하던 9회초 5점을 뽑으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9회 2사 이후 신경식이 밀어내기 볼넷으로 균형을 깼다. 다음타자 김유동. “타석에 들어가기 전에 불렀다. 이미 승부는 끝났다고 봤다. ‘초구로 직구가 올 것이다. 무조건 노려 쳐라’고 했다. 투수의 심리를 잘 알기에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공이었다.” 결국 OB는 김유동의 만루홈런으로 8-3 승리를 거두며 원년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지금도 김영덕의 왼손에 낀 반지에는 ‘OB 40번 1982년’이 새겨져 있다.

“그 경기를 얼마 전에도 TV에서 다시 봤다. 지금 봐도 그날 박철순은 아픈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꼭 이기겠다는 의지가 정말 대단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박철순에게는 못할 짓이었다. 9회 마지막 땅볼을 잡으려고 하다 또 허리를 삐끗했는데, 나중에 우승 헹가래를 칠 때 박철순은 그 아픈 허리를 만지며 엉거주춤하고 있다. 세월을 되돌릴 수 있다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년 우승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바꿨다. 박철순이 지금껏 감독이나 코치를 하고 있다면 마음이 가벼울 텐데 그렇지 못해 더욱 안쓰럽다. 빙그레 감독 때였다. 박철순을 코치로 데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이종남(작고) 기자가 말렸다. ‘박철순은 영원한 OB맨입니다. 데려가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OB, 그리고 김성근과 삼성

1983년 OB는 추락했다. 우승 후유증이 컸다. ‘페넌트레이스의 마술사’ 김영덕이 유일하게 시즌 승률 5할을 달성하지 못한 해다. OB와의 인연도 끝났다. 떠나는 과정에서 감정의 앙금이 많이 남았다. OB 구단과도, 후배 김성근과도 껄끄러운 사이가 됐다. 1984년 삼성과 OB의 전쟁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김영덕은 당시의 결정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진실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그 때의 얘기를 들어봤다. 처음으로 털어놓는 얘기라면서 세간의 오해와 관련해 자신이 간직한 진실을 말했다. 그 대신 보도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았다. 30년 전의 일을 다시 끄집어내서 관련된 사람들과 다시 얼굴을 붉히기 싫다는 뜻이었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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