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소치 ‘위대한 도전’] 이규혁 어머니 “아들의 올림픽 恨…6번째 뒷바라지 힘든거 몰라요”

입력 2014-02-0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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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혁의 어머니이자, 한국 피겨의 대모인 이인숙 씨는 6번째 올림픽에 나서는 아들을 묵묵히 응원하고 뒷바라지해왔다. 이 씨가 자신의 사무실에 걸어놓은 아들의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3회 우승 기념 액자 앞에서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스프린트선수권은 빙속 단거리 선수들에게 올림픽 다음으로 ‘가장 우승하고 싶은 대회’로 꼽힌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

5. 금 보다 값진 불굴의 도전사

20년간 ‘올림픽 뒷바라지’
빙속 이규혁 어머니 이인숙씨


“우리 아들이 그동안 그 많은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고 세계기록을 숱하게 세웠는데…. 단지 올림픽 메달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이름이 지워져 버릴까봐, 그걸 가장 가슴 아파 하더라고요.”

어머니의 눈가에 끊임없이 눈물이 맺혔다. 간간이 목소리도 떨렸다. 5번 넘어졌지만 6번 일어난 아들을 떠올리다 왈칵 감정이 북받친 탓이다. 한국스피드스케이팅의 대들보 이규혁(36·서울시청). 그는 2014년 소치에서 6번째 올림픽 스타트라인에 선다. 피겨국가대표 출신이자, 전국스케이팅연합회장인 어머니 이인숙(55) 씨는 그 6번의 역사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응원한 조력자다.

어머니는 고개 숙인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줬다고 한다. “그동안 너만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네가 앞에서 끌어줬기에 후배들도 올림픽 메달을 딸 수 있었다. 모든 이들이 오랫동안 너를 기억할 것이다.” 어머니의 말이 맞다. 소치올림픽 결과와 관계없이 이규혁은 여전히 한국빙상에서 가장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스타다. 그래서 스포츠동아는 아들을 소치로 배웅하고 돌아온 어머니를 직접 만나 지난 20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중학교때 첫 올림픽·1997년 한국 첫 세계신
국제 대회 숱한 메달들…올림픽에서만 실패
아들의 아픈 세월 20년 함께 딛고 다시 응원

규혁아,
네가 있어서 후배들이 메달을 딸 수 있었어
6번째 올림픽을 도전하는 너의 투지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널 기억할거야!


-벌써 아들의 6번째 올림픽이 눈앞입니다. 첫 올림픽(1994년 릴레함메르)이 기억나시나요?

“그때는 규혁이가 중학생이었죠. 다들 ‘신동’이라 했고 고맙게도 좋은 기회가 와서 올림픽에 갔는데, 나이가 너무 어려서 그냥 참가에 의의를 둔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스피드스케이팅국가대표 출신 이익환 씨)나 동생(피겨국가대표 출신 이규현 코치)까지 모두 올림픽 가족이라 뿌듯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선수였죠?

“확실히 소질이 있었죠. 내가 운동을 힘들게 해서 처음에는 스케이트를 시킬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규혁이가 다니던 초등학교(리라)에 스케이트와 롤러스케이트 챔피언을 가리는 교내대회가 있었거든요. 다른 엄마들은 1등 시키려고 좋은 롤러스케이트 장비도 사주고 레슨도 시켰는데, 규혁이가 4학년 때 친구 걸 빌려 탔다가 1등을 해버린 거예요. 내가 애한테 ‘그냥 2등 하지 왜 1등을 해서 엄마 피곤하게 하냐’고 핀잔도 주고.(웃음) 스케이트대회 때도 그랬어요. 어릴 때부터 힘이 좋아서 ‘막폼’으로 한참 가다가 힘들면 뒤 돌아보고, 누가 좀 쫓아왔다 싶으면 다시 또 막 타서 1등 하고…. 그때 사람들이 ‘보통 재능이 아니니 본격적으로 시켜봐라’ 해서 그렇게 된 거예요.”


-선수가 된 후에도 승승장구했죠. 한국스피드스케이팅선수로는 최초로 세계기록(1997년)도 세웠으니까요. 그런데 유독 올림픽에서만 운이 없었습니다.

“2010년 밴쿠버대회 때였어요. 경기시간에 절에서 한 시간 넘게 기도하고 있었거든요. 관계자분한테 전화가 오기에 ‘어떻게 됐냐’ 하니까 아직 경기를 안 했다고…. ‘한 시간이 지났는데 무슨 소리냐’ 했더니 정빙기가 고장 나서 지연됐다는 거예요. 그 소리를 딱 듣고 ‘아, 우리 규혁이는 안 되는구나’ 싶더라고. 2시간 쉬었다가 다시 컨디션을 끌어올려서 시합시간에 맞춰야 하는데, 안 그래도 나이가 많은 규혁이한테는 몸도 마음도 부담이 더 크죠. 그때 무너진 거예요.”


-0.05초차로 4위가 된 2006년 토리노대회도 있었고, 세계기록 보유자로 출전했던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대회도 있었지만, 유독 밴쿠버 때가 안타까우신 듯합니다.

“그 전에는 큰 부담감이 없었어요. 간절함이 덜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밴쿠버 때는 나이 때문에 ‘이번에 안 되면 더 이상 힘들다’는 생각이 많았거든요. 다른 세계대회에선 펄펄 날다가 올림픽에서만 못 따니까 그게 너무 한이었고요. 또 올림픽을 앞둔 시즌에 정말 잘 탔고, 모두가 기대했고, 본인도 자신이 있었고. 그 절실한 기대가 무너졌을 때, 규혁이 심정이 어땠겠어요. 그게 가장 가슴이 아팠어요.”


-그래서 밴쿠버대회가 끝나고 ‘이제 그만 하자’고 하신 건가요.

“너무 고생했잖아요. 규혁이가 밴쿠버 경기 전에 생전 안 보내던 문자메시지도 보내서 마음이 정말 찡했을 정도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올림픽 끝나자마자 나간 세계선수권에서 또 우승을 한 거예요. 저도 아쉽고 안됐으니까 ‘그럼 힘 떨어져서 정말 안 될 때까지 1년씩 한 번 해보자’고 했죠.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뒷바라지하는 부모님도 힘드셨을 듯합니다.

“우린 오히려 다른 부모들처럼 세심한 뒷바라지는 못했어요. 다만 부모가 다 빙상 전문가들이니까 막힐 때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장점은 있었다고 봐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운동 이외의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게 하는 거였어요. 우리 아버지가 절 운동시킬 때 그러셨거든요. 다른 건 다 못해도 되고, 스케이트를 못 탔을 때만 혼났어요. 그런 게 몸에 뱄던 것 같아요.”


-아들의 경기는 직접 많이 보셨나요.

“아뇨. 전혀 안 봤어요. 1996하얼빈동계아시안게임에 제가 여자 피겨 총감독으로 갔다가 모처럼 경기를 보러 갔어요. 규혁이가 그때 딱 너무 못 탄 거예요. 아, 그걸 직접 보니까 뭐라 말할 수 없게 가슴이 아픈 거야. 하필 내가 경기장에 가서 그런 것 같고.(웃음) 그 다음부터는 못 보겠어서, 국내대회에 가도 규혁이 탈 때는 밖으로 나와요.”


-이번 올림픽 생중계는 보실 건가요.

“TV로도 못 봐요, 사실. 볼 때마다 평생을 저 라인에 섰다가 뛰어 나가야 되는 긴장감에 애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은 거야. 아들 수명이 단축될 것 같고. 피겨는 점프 뛰다 실패해도 한 번 더 뛸 수 있지만, 스피드는 한 번 못 타면 끝이잖아요. 생방송은 안 되겠어요.”


-이번 대회는 정말 선수 이규혁의 ‘마지막’이겠네요.

“그럼요. 이번엔 정말 은퇴죠. 이번 시즌에는 기록이 워낙 저조해서 큰 기대는 안 해요. 아무래도 스케이트날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야. 얼마 전에 먼저 탔던 걸로 바꿨다고 하더라고요. 타이밍만 맞아주면 폭발적으로 한 번 나가줄 수 있는데, 아쉽지. 그냥 하는 데까지만 열심히 했으면 좋겠네요.”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지난 생일 때 규혁이가 ‘멋지게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카드를 써줬어요. 사랑한다고 옆에 하트까지 그려놓고.(웃음) 애가 이렇게 글도 잘 써요. 중학교 때 독일전지훈련을 가서 편지를 한 번 썼는데, 우리 집안이 모두 국가대표 출신이라 자기도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너무 부담을 가졌는가 싶어 가슴이 뭉클하더라고.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의미 있게 마무리했으면 좋겠어요. 한국선수가 6번 올림픽에 나가는 건 동·하계 통틀어 최초라면서요. 그렇게 최고의 선수이니, 나중에는 후배들에게 좋은 노하우를 많이 전수해줬으면 좋겠네요.”

배영은 기자 yeb@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goodgo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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