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영통신원의 네버엔딩스토리] 명예의 전당 입성 토마스, 아버지에게 바친 값진 눈물

입력 2014-07-30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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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 허트’ 프랭크 토마스

7년연속 3할·20홈런·100타점·100볼넷 유일
아버지 떠난 2001년 팔근육 부상 등 최악의 해
2007년 메이저리그 21번째 500홈런 금자탑
화이트삭스의 배신에도 은퇴 후 친정팀 해설
기자단투표 83.7% 득표…명예의 전당 영예

지난 28일(한국시간) 거행된 명예의 전당 입회식에서 프랭크 토마스(46)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7년 연속 3할대 타율-20홈런-100타점-100볼넷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인 토마스는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신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토마스는 19년 현역생활 중 절반 이상을 지명타자로 활약했음에도 헌액 자격을 얻은 첫 해에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토마스는 지난 1월9일 미국야구기자협회(BBWAA)에서 10년 이상 활동한 기자 571명 중 83.7%의 득표를 얻어 75% 이상이라는 자격요건을 충족시켰다. 토마스는 통산 타율 0.301, 521홈런, 1704타점의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 약물 복용이 만연된 시대를 거치면서도 그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남긴 기록이어서 더욱 의미가 크다.

키 195cm, 몸무게 109kg의 거구인 토마스는 ‘빅 허트(The Big Hurt)’라는 닉네임이 붙을 정도로 상대 투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약물에 의존한 선수가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되는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토마스의 화려했던 야구 인생을 조명해 본다.


● 미식축구 장학생에서 야구선수로

1968년 8월2일 조지아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난 토마스는 어린 시절부터 미식축구와 야구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불과 15살 때 4번타자로서 콜럼버스 고등학교를 조지아주 챔피언으로 이끌었고, 졸업반 때는 0.440의 타율을 기록하면서도 미식축구 선수로서 조지아주 올스타로 선정됐다. 또한 농구팀에서는 포워드로 활약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1986년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 토마스는 그해 가을 어번대학으로 진학했다. 야구가 아닌 미식축구 선수로서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것이다.

하늘의 뜻이었을까 큰 부상을 두 차례나 당한 토마스는 미식축구를 포기하고 야구에만 전념, 1988년 서울올림픽 대표선수 후보로 거론될 만큼 뛰어난 실력을 뽐냈다. 비록 최종 엔트리에 들지 못했지만 대학 3학년 때 타율 0.403, 19홈런, 장타율 0.801의 엄청난 성적을 올렸고, 졸업반 때 남서부 컨퍼런스 MVP를 차지했다. 1989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전체 7번으로 그를 지명했다.


● ‘빅 허트’의 전성기

1990년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토마스는 정교함과 파괴력을 겸비한 타자로 올라섰다. 실질적 루키 시즌인 1991년 타율 0.318, 32홈런, 109타점, 138볼넷을 기록해 실버슬러거 상을 차지했다. 아메리칸리그(AL) MVP 투표에서는 칼 립켄 주니어(당시 볼티모어)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초년병 시절부터 정상급 스타에 버금가는 활약을 펼치자 화이트삭스의 중계를 담당했던 켄 하렐슨은 ‘빅 허트’라고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남들은 평생 한 번 차지하기 힘든 MVP를 토마스는 1993년과 1994년 2년 연속 받았다. 1993년에는 41홈런으로 화이트삭스 구단 신기록을 수립했고, 이듬해에는 파업으로 113경기만 치렀음에도 38홈런, 101타점의 놀라운 성적을 남겼다. 1루수가 2년 연속 리그 MVP에 오른 것은 지미 팍스(1932∼1933년)에 이어 토마스가 처음이었다.

그가 최고의 타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파워를 앞세우면서도 선구안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개인 최다인 138개를 기록한 1995년을 비롯해 4차례나 AL에서 가장 많은 볼넷을 얻어냈다. 또한 1997년에는 타율 0.347로 타격 1위에 올랐다. 1996년 생애 최고인 타율 0.349를 기록하고도 2위에 오른 한을 씻어낸 것이었다. 이후 2년간 슬럼프를 겪었으나 2000년 단일시즌 최다인 43홈런, 143타점을 기록하며 ‘올해의 재기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 화이트삭스의 배신 그리고 재기

부상을 당해 불과 20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한 2001년은 생애 최악의 해였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오른팔 근육 부상으로 시즌을 일찌감치 접은 것이다. 2002년에는 148경기에 나섰지만 생애 최저인 0.252의 저조한 타율을 보였다. 이후 토마스는 단 한 차례도 3할대 타율을 기록하지 못했다. 선수로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2005년은 화이트삭스가 ‘블랙삭스 스캔들’을 딛고 88년 만에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한 해다. 그러나 부상을 당한 토마스는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동료들이 우승하는 장면을 씁쓸히 지켜봐야 했다. 또한 시즌을 마치자마자 팀에서 방출 통보를 받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16년 동안 몸담았던 화이트삭스에 대한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제리 웨인스도프 구단주로부터 전화 한 통 받지 못했고, 켄 윌리엄스 단장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가운데 받은 결별 통보였다.


● 500홈런 클럽에 가입하다

새둥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 계약을 맺은 2006년 토마스는 39홈런, 114타점을 올리며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다.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솔로 홈런 2방을 터뜨리며 3-2 승리에 앞장 선 그는 포스트시즌 멀티 홈런을 기록한 최고령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한 물 갔다는 평가와는 달리 건재함을 과시하자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2년 총액 1800만 달러의 조건을 제시했다. 2007년 6월28일 미네소타 트윈스전에서 토마스는 카를로스 실바를 상대로 개인통산 500호 홈런을 쏘아 올렸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21번째로 500홈런 클럽에 가입하는 영예를 안은 순간이었다.

26홈런, 95타점을 올리며 몸값을 했지만 다음 해 시즌 초반 1할대 타율을 보이자 전격적으로 방출을 당했다. 다시 오클랜드와 계약을 맺었지만 토마스는 잦은 부상으로 55경기만 나선 끝에 은퇴를 선언했다.

친정팀 화이트삭스의 해설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토마스의 등번호(39번)는 2010년 8월29일 영구결번으로 지정됐고, 이듬해 7월31일에는 그의 동상이 화이트삭스의 홈구장인 US셀룰러필드에 세워졌다.

손건영 스포츠동아 미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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