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야구여행] ‘홈런 공장장’ 안영명의 역습

입력 2015-06-19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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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안영명은 2009년 ‘홈런공장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많이 얻어맞은 경험을 바탕으로 올 시즌 팀 내 다승 선두를 달리는 선발로 성장했다. 스포츠동아DB

2009년 26경기 선발등판 34개 홈런 불명예
최다 피홈런 신기록에도 “맞으면서 배운다”
올시즌 19경기 7승2패 호투…피홈런 5개뿐

홈런을 맞아본 투수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결정적 승부처에서 맞는 홈런이 주는 낭패감, 창피함, 괴로움, 그리고 두려움, …. 그 창피함은 소심함으로 이어지고, 그 두려움은 열등감으로 연결된다. 그러다보면 투수는 어느 순간 마운드에 오르는 게 고역이 된다.

한화 안영명(31). 한때 ‘홈런공장장’이었다. 2009년 26경기에 선발등판해 무려 34개의 홈런을 맞았다. 한국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피홈런 신기록. 지금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하루에 4개를 두들겨 맞기도 했고, 홈런 3개를 허용한 것도 4경기나 됐다.

바람만 스쳐도 눈물 날 것만 같은 스물다섯 살의 앳된 얼굴. 그러나 그는 순한 외모와는 달리 내면이 강했다. 9월 15일 대구 삼성전. 자신의 시즌 30호와 31호 피홈런을 기록했다. 1999년 해태 곽현희가 작성한 역대 시즌 최다 피홈런 타이기록을 세웠다. 팀 성적이 꼴찌인 마당에 피홈런 신기록이라는 불명예를 피하려면 시즌 마지막 등판은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했다. 붙겠다고 했다.

“차라리 여기까지 왔으니 타이기록보다는 신기록을 세워도 괜찮겠어요.” 당시 한화 담당으로 ‘홈런공장장’으로 공인돼가던 그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기자는 그 태연했던 미소가 지금도 떠오른다. 그는 홈런 맞는 것에 창피해하지 않았고, 움츠러들지 않았다. 결국 9월 20일 문학 SK전에 마지막 선발등판을 감행했다. 패기 있게 등판해 시원하게 맞았다. 홈런 3방(32·33·34호)을 내주며 신기록을 썼다.

그는 그 해를 실패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홈런이 고맙다”고 했다. “어떤 공이 홈런을 맞는지 알아가고 있어요. 앞으로 내가 무엇을 더 보완해야 할지 공부하는 셈이죠. 맞으면서 배운 한 해였습니다.”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앳된 얼굴. 안영명은 어느새 한화 투수조장의 위치까지 올랐다. 그리고 올 시즌 19경기(13선발)에 등판해 벌써 7승(2패)을 수확했다. 팀 내 최다승. 아직 시즌 반환점이 한참 남은 시점임을 고려하면, 2009년 피홈런 신기록을 수립할 때 그가 거둔 생애 최다승인 11승도 뛰어넘을 수 있는 페이스다. 그 11승은 2008년 이후로 따지면 류현진 외에는 한화 투수로는 유일하게 기록한 두 자릿수 승리다. 올해 59.1이닝을 던져 내준 홈런은 불과 5개다. 피홈런 순위 40위권이다. 하루에 4개씩이나 홈런을 맞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홈런공장장의 역습’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홈런 허용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홈런은 점수를 주는 방식의 하나일 뿐입니다. 맞기 싫어 주자를 쌓아두다가 안타를 맞아도 점수를 주잖아요. 투수는 홈런 맞는다고 해서 야구인생을 패하는 게 아니라 승부를 피할 때, 도망갈 때 야구인생에서 패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승부를 두려워한다면 유니폼을 벗어야죠.”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If it‘s good, it’s wonderful. If it‘s bad, it’s experience)”라는 명언(미국 작가 캐럴 터킹턴)이 있다. 안영명은 6년 전 ‘홈런공장장’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 맷집을 키웠고, 면역력을 만들었다. 아팠던 경험으로 인해 구종 개발의 필요성을 느꼈고, 컨트롤을 가다듬는 데 더욱 힘썼다. 2009년 직구와 슬라이더의 ‘투 피치’로 타자와 싸웠던 그는 지금 서클체인지업, 커브, 너클커브까지 자유자재로 던지며 타자를 요리하고 있다.

경험은 후배들에게도 생생하게 조언해줄 수 있는 무기. 안영명은 요즘 홈런을 맞고 덕아웃에 들어와 풀이 죽어있는 후배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한다. “형은 예전에 한 해에 홈런 서른 몇 개도 맞았어. 홈런 맞는다고 야구인생 끝나는 거 아니더라. 힘내.”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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