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18.44m] 잘하면 로또, 못하면 팀의 역적…외국인선수 향한 무언의 폭력들

입력 2015-08-27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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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더도 덜도 아닌 용병일 뿐이다. 잘되면 일본인선수가 영광을 차지하고, 잘못되면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 1970∼1980년대 일본프로야구에서 외국인타자로 활약하며 홈런·타점·타격 1위를 모두 차지했던 레론 리(67)의 말이다. 그는 일본에서 11년을 뛰었고, 거기에서 뛰는 외국인선수들의 대부 같은 존재였다. 그의 동생 레온 리도 일본에서 뛰었고, 오릭스 감독까지 역임했다. 이런 ‘모범용병’들조차 아시아야구에서 뛰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것이다. 어떨 때는 거액의 연봉을 주고 우승청부사인 양 떠받들다가, 약간 야구가 흔들리면 팀의 일원으로서의 태도 문제를 들먹이니 말이다.


# 이제 한국프로야구도 외국인선수 없이는 리그 자체가 성립되기 힘들다. 일본프로야구가 머니게임에서 쩔쩔 맬 정도로 몸값 비중이 커지고, 외국인선수 스카우트 파트도 정밀화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외국인선수=로또’라는 푸념이 존재한다. 뽑아주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구단 안에서 어떻게 녹아드느냐의 문제는 별개다. 이러다보니 야구를 잘하면 기행을 일삼아도 간이라도 빼줄 듯하다가, 못하는 순간 팀 몰락의 원흉으로 신세가 역전된다. 특히 망하는 팀일수록 실패의 원인을 외국인선수들에게 전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 감독들이 ‘외국인선수 길들이기’를 통해 국내선수들의 기강을 잡으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물론 ‘잘하는 외국인선수라고 응석을 받아줄 수 없다’라는 NC 김경문 감독처럼 명분을 확보한 케이스도 있으나, 외국인선수 입장에선 억울하고 황당한 상황도 있었을 터다. 갈수록 완화되고 있지만, 외국인선수가 판정이나 투표 등에서 비상식적 불이익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이래놓고 이 선수들이 돈을 쫓아 일본으로 떠난다고 손가락질을 한다면 공평할까. 외국인선수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두산 더스틴 니퍼트, 롯데 조쉬 린드블럼 같은 본받을 만한 외국인선수가 팬들 앞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 선수들을 KBO리그의 일원으로서 인정하고, 돈 이상의 무언가를 줄 수 있는 관용의 문화가 우리에게는 있을까. ‘불량용병’을 ‘불량용병이라 부르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외국인선수도 우리의 틀에 끼워 맞추려는 무언의 집단적 폭력을 경계할 일이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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