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다니엘은 오늘도 최소한의 권리를 꿈꾼다

입력 2018-07-23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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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사회의 부조리한 복지제도를 짚는 동시에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온기를 놓치지 않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 문제를 꾸준히 만들어온 켄 로치 감독은 이 작품으로 2016년 칸 국제영화제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사진제공|영화사 진진

영국 사회의 부조리한 복지제도를 짚는 동시에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온기를 놓치지 않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 문제를 꾸준히 만들어온 켄 로치 감독은 이 작품으로 2016년 칸 국제영화제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사진제공|영화사 진진

■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일자리 잃은 목수와 싱글맘의 이야기
을들의 전쟁에 소시민들 분노와 공감
당연히 누려야 할 우리들의 기본 권리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큰 울림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다.

직업은 목수였다. 지난 40년 동안 성실히 집을 짓고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세상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없다. 적어도 목재를 이용해 책장이나 가구를 만들 줄 안다. 아이들을 위한 목재 모빌도 어려움 없이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저것, 집안의 부서지고 떨어지고 낡아버린 것들은 내 손 안에서 새 것으로 고쳐진다.

어느 날 아내가 병을 얻었다. 아내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어서 똑똑하고 유쾌하며 상냥했고 마음이 아주 넓어서 나를 늘 웃게 해주었다. 하지만 “바람에 기대어 먼 바다로 떠나고 싶다”면서 나만을 이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두고 말았다.

나도 심장병을 앓고 있다. 일을 하다 심장마비로 추락사할 뻔한 위기까지 넘겼다. 그 위태로움이 언제 엄습해올지 솔직히 좀 두렵다. 병은 기어이 내게서 일자리를 앗아 갔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사진제공|영화사 진진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사진제공|영화사 진진


● 빈곤의 설움…어이없는 매뉴얼

나는 이제 실업자가 됐다. 질병으로 일을 잃어도 최저치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질병수당을 지급한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집을 한 채 짓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리고 더 난해한 그래서 결국 불가능해지고 말 일에 맞닥뜨리고야 말았다.

우선 내 병세를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의사도, 간호사도 아닌 의료전문가라는 고용지원센터 심사관은 내 질환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주치의는 분명 아직은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진단했는데도 말이다. 결국 부적격 판정 통보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이를 따지기 위해 상담전화를 걸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매뉴얼화한 안내음성과 음악뿐이다. 1시간 48분 만의 통화, 돌아온 답은 어이없게도 부적격 판정 통보서보다도 심사관의 전화가 더 먼저라며 기다려보라는 것이었다.

다시 찾아간 센터에서 직원은 인터넷을 통해 부적격 항고나 재심사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알려줬다. 하지만 컴퓨터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그래도 수당을 포기할 수는 없다. 시도하고, 또 시도해보지만 쉽지 않다. 몇날 며칠을 허비하고 나니 진이 다 빠져 버렸다.

센터 직원들은 이번엔 왜 일할 수 있는데 구직 노력을 게을리 하느냐는 투다. 분명히 내 주치의는 질환의 위태로움을 심각하게 경고했다. 그런 몸을 이끌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는 건 또 얼마나 위험하고 두려운 일인가.

아이 둘을 키우는 싱글맘 케이티 모건을 만난 곳도 그런 답답한 센터에서였다.

특별한 직업을 찾지 못하는 케이티는 곤궁한 런던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케이티는 런던의 물이 새는 방에서 아이를 키웠지만 아이는 그 탓에 병을 달고 살았다. 집주인에게 항의했지만 쫓겨나고 말았다. 이후 2년 동안 노숙자 쉼터에서 살았다. 아이들의 학교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아이는 스트레스 탓에 산만해져갔다. 결국 케이티는 집세가 너무 비싼 런던을 떠나 이곳, 뉴캐슬로 스며들었다.

새 삶의 터전을 마련했지만 뉴캐슬은 여전히 낯선 곳. 갓 이사해 길을 헤맨 케이티는 그 때문에 생활지원금 신청을 위한 심사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센터에서 쫓겨난다.

안쓰럽다. 케이티와 아이들을 데리고 식료품 지원소를 찾았다. 아이들을 챙겨 먹이기에도 버거운 케이티는 이미 너무도 배가 고팠다.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남몰래 통조림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허겁지겁 먹다 설움에 겨운 눈물을 흘린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사진제공|영화사 진진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사진제공|영화사 진진


● ‘우리’ 그리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

세상은 질병의 상태를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는 한 인간에게 자존심마저 내려놓으라 요구했다. 질병의 상태를 스스로 증명해내지 못한 채 수당을 받기는커녕 심장이 마비돼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몸으로 잡지도 못할 일자리를 헛되이 찾아다니는 것은, 나는 물론 그런 환자와 상대하며 판에 박힌 관료적 매뉴얼과 탁상행정의 원칙만을 외칠 수밖에 없는 센터 직원들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일 뿐이다. 그때 돌아오는 건 수치심이다.

세상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에게 변변한 생리대마저 마련해주지 못했다. 케이티는 식료품 지원소에서 생리대를 찾았지만 그것은 거기 없었다. 몇 푼 남지 않은 생계비로 마트에서 아이들을 먹일 몇 조각 빵을 사면서 기어이 생리대를 훔치다 남성 보안요원에게 발각된 그에게 돌아온 것도 수치심뿐이다.

케이티만이 아니다. 세상은 적지 않은 소녀들에게 운동화 깔창으로 생리대를 대신하게 한다. 그들이 겪어내야 하는 수치심은 케이티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수치심은 그저 이들 모두가 개별적 가난한 인간으로서 마냥 감당해내야만 하는 것인가. 개별적 인간의 책임이 아니라면 세상은 무엇을 내어줄 수 있는가. 그런 세상에 인간의 존엄성은 대체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인가.

그런 개별적 인간 옆에 또 다른 개별적 인간이 서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위안을 삼아야 하는 것일까. 케이티는 소중한 노동으로서 함께하는 세상의 희미하게나마 따스함을 안겨주었다. 컴퓨터 사용법을 알려준, 옆집의 가난하고 껄렁한 흑인 청년 파이퍼와는 이웃의 정을 나눴다.

하지만 세상이 마땅히 채워줘야 할 것을 채워주지 못하고, 메워줘야 할 것을 메워주지 못할 때, 존엄한 존재로서 개별적 인간끼리 서로에게 다가가기는 영원히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세상사는 이미 수없이 이를 보란 듯 입증해왔다.

‘8350원’이라는, “근로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가가 최저기준을 정해 사용자에게 그 지급을 강제하는 임금”(실무노동용어사전, 중앙경제 펴냄)의 내년도 액수도 그 입증일까. 이젠 편의점 점주와 알바생으로 상징되는, 이미 대자본에 떠밀려 공정하지 못한 계약의 구조로 알량한 수익구조에 노심초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소상공업자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을 몰고 왔으니 말이다. 정작 마땅히 채워주고, 메워줘야 할 세상은 방관할 뿐이니, ‘을들의 전쟁’은 개별적 인간의 존엄성 대신 갈등으로 세상을 떠받쳐 그 어긋난 구조만을 배불리는 것은 아닐까.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니다.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니다.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다.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던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다.

인간으로서 존중을 요구하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우리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사진제공|영화사 진진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사진제공|영화사 진진


■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 켄 로치 감독의 2016년 작품. 심장질환으로 일자리를 잃은 40년 목수 경력의 다니엘 블레이크와 싱글맘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케이티 모건의 이야기. 복지제도의 잘못된 시스템으로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빈곤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그래도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소시민들의 모습을 통해 세상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한다. 켄 로치 감독에게 2006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이어 10년 만에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겨줬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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