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바둑관전기]침묵이그려내는승부

입력 2008-09-0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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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은 중반에 들어선 현재 백이 약간 재미있는 형국이다. <실전> 흑1로 붙인 뒤 3으로 덜컥 끊어간 수가 이재웅으로선 회심의 일착. 미안한 얘기지만 졌으면 패착의 오명을 뒤집어쓸 뻔 했다. 이재웅은 들척지근한 혼자만의 수읽기를 하고 있었다. 바둑을 조금 더 진행시켜 보자. 백이 흑7까지 된 뒤 8로 찌르고 나오니 이재웅의 얼굴이 허옇게 뜬다. 이재웅이 읽었던 것은 <해설1>. 백이 1로 흑 한 점을 곱게 잡아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흑은 2·4로 둔다. 백 두 점을 선수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까. <실전> 흑9로 뛰는 이재웅의 입맛이 설탕 대신 모르고 소금을 집어넣은 커피를 마신 듯하다. <해설2> 흑1로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백4까지 되어서는 흑이 한 게 하나도 없다. 상변에서의 실수로 바둑은 거의 백승으로 굳어져 간다. 물론 ‘굳어져 간다’가 곧 ‘굳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상은 백승이 유력하지만 승부사의 마음은 이제부터가 승부이다.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 상대는 감추어두었던 비수를 갈비뼈 사이로 깊게 찔러올 것이다. “김기용, 컷!” 스튜디오에서 PD가 나직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이윽고 화면 가득 김기용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채 아무 말 없이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다. 대국장에서는 초를 읽는 계시원의 목소리만이 건조하게 울려 퍼진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대국장의 분위기는 너무 적막하다. 아마도 바둑 대국장은 지구상의 모든 스포츠 중 가장 적막한 경기장일 것이다. 양궁이라면 중간 중간 관중들의 응원소리라도 들릴 테지만, 바둑은 그럴 수도 없다. 바둑은 침묵이 그려내는 승부인 것이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해설=김영삼 8단 1974ys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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