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조립식가족’에서 성공한 청년사업가 ‘모세’ 역을 맡은 허규.   사진제공 | 창크리에이티브

연극 ‘조립식가족’에서 성공한 청년사업가 ‘모세’ 역을 맡은 허규. 사진제공 | 창크리에이티브




보육원 퇴소 청년들의 명절, 무대 위에 펼쳐
허규, 노래 대신 대사로 꺼낸 마음의 이야기
웃음 뒤에 숨은 진실…‘조립식 가족’의 두 얼굴
코미디로 시작해 눈물로 끝나는 연극 한 편
뮤지컬 무대 위에서 늘 핵폭탄 같은 에너지로 열정과 땀의 ‘흠뻑쇼’를 보여주었던 록커 출신 배우 허규. 그러나 이번 여름, 그가 택한 무대는 좀 다른 것 같다. “1년만 맡긴다더니 30년이 지났다”는 대사 한 줄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그는 ‘모세’라는 이름으로 연극 무대에 서기로 했다.

연극 ‘조립식 가족’은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30대 남녀 청년들이 명절에 다시 모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2022년 초연 당시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호평받은 이 작품은 3년 만에 재연을 맞아 이야기가 더욱 단단하게 다져졌다. 허규가 이번 시즌에서 맡은 모세는 보육원 출신으로, 자유분방한 성격의 청년 사업가다.

● ‘모세’는 웃기지만, 웃고 싶었던 사람
“연극은 여전히 저에게 낯설고 두려운 무대예요.” 허규에게 이번 ‘조립식 가족’은 두 번째 연극 출연이지만, 여전히 그는 이 장르 앞에서 겸손하다. “뮤지컬은 음악이 감정을 감싸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연극은 모든 걸 배우가 오롯이 짊어져야 해요. 대사 하나, 숨소리 하나까지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규는 이 작품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초연 때에도 출연제안을 받았지만 당시는 아쉽게도 스케줄 문제로 무산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무조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본을 읽자마자 ‘이건 내가 꼭 해야 할 역할’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특히 ‘모세’라는 캐릭터가 저랑 너무 닮아 있었죠. 말투도 그렇고, 매사를 장난처럼 넘기는 방식도 그렇고요.”

‘모세’는 마흔도 되기 전에 네 번째 결혼을 준비하는 청년 사업가다. 외형적으로는 성공한 인물이지만, 내면엔 오래된 상처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극 초반,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1년만 있으면 데리러 온다더니 30년이 지났다.” 허규는 그 대사를 읽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했다. “연극 대사가 아니라 누군가의 진짜 이야기라는 느낌이 확 왔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고 있겠죠. 가슴이 막히더라고요.”

‘조립식 가족’은 보육원 퇴소 청년들의 이야기를 현실적이면서도 유쾌한 톤으로 풀어낸다. 가족도, 피붙이도 없이 명절을 보내는 이들의 하루를 때론 코미디로, 때론 날카로운 현실화로 새긴다.

“읽을 땐 재밌게 읽었는데, 막상 연습 들어가서 줄 쳐가며 대본을 다시 보니 넘길 때마다 제 대사더라고요.” 허규는 ‘모세’가 단순히 비중 있는 역할이 아니라,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인물이라는 걸 실감했다고 했다. “노주현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을 다 ‘모세’를 통해 쏟아낸 거예요. 사회가 외면하는 보육원 퇴소 청년들의 현실, 그 안의 외로움, 분노, 자립의 고통 같은 것들이죠.”

허규가 언급한 작가는 이 작품을 제작한 창크리에이티브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고아사랑협회 부회장을 맡아 보육원 출신 청년들의 자립을 돕는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다. ‘조립식 가족’의 에피소드들은 이들 청년들이 경험한 실제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허규(왼쪽에서 두 번째)와 연극 ‘조립식가족’ 출연배우들.

허규(왼쪽에서 두 번째)와 연극 ‘조립식가족’ 출연배우들.

●이젠 오래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
허규는 이 작품을 통해 배우로서 새로운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유명 록밴드 출신의 가수 겸 뮤지컬배우이다. 피노키오의 3기 보컬리스트로, 현재는 ‘나는 반딧불’로 유명해진 황가람이 이 밴드의 보컬을 맡고 있다.

“한때는 ‘나는 가수인가? 배우인가?’ 같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이젠 그냥 나이에 맞는 역할을 오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주인공 욕심보다는 오래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더 중요해졌죠.”

허규는 이번 작품출연이 ‘선한 영향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계기가되었다고 했다. “연탄을 나르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배우로서 제가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할 기회를 가진다는 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거든요”라고 했다.

연극 ‘조립식 가족’은 8월 6일 대학로 지구인 아트홀에서 막을 올린다. 허규는 출연배우들과 연습실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무대에서 보육원 퇴소 청년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마음을 다해 풀어낼 준비를 하고 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더 붉은 색깔의 마음이 섞인, 태어난 곳은 달라도 자라난 곳은 같았던 가족의 이야기가 허규의 ‘모세’를 통해 올 여름 대학로 무대를 채울 것이다.
허규는 말했다. “누군가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족이 없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 사람들의 가족이 되어주면 되는 거죠.” 허규가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 이 한 마디로 충분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