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만난 사람] “양준혁 부친 은퇴식 ‘아버지리그’서 했지”

입력 2010-10-0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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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신’의 아버지와 ‘국민타자’의 아버지가 삼성의 승리를 기원하며 함께 포즈를 취했다. 이승엽의 아버지 이춘광(오른쪽) 씨는 양준혁의 은퇴식이 열리기 하루 전 부친 양철식 씨의 또다른 그리고 특별한 은퇴식을 열었다.

■ 양준혁·이승엽 부친 양철식·이춘광씨

아들 은퇴식 하루전 아버지끼리 은퇴식
‘20년 지기’ 이승엽 아버지가 마련해줘

“아들이 잘해도 팀이 지면 기뻐해선 안돼”
가을잔치 숨은 조력자…그 이름 아버지
“프로 아들 키우려면 아버지도 프로 돼야”


선한 눈매가 닮아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누가 누구의 아버지임을 알만큼…. 눈가에 깊이 팬 주름은 세월을 말하고 있었다. 자식을 최고의 야구선수로 키워내며 겪은 마음고생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언젠가부터 그들은 대구지역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됐다.

역대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히는 2002년 한국시리즈. 삼성은 20여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의 숙원을 풀었다. 최종전이던 6차전 9회말 극적인 3점 홈런을 날렸던 이승엽(34·요미우리)은 경기가 끝난 직후, 양준혁(41·삼성)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무뚝뚝한 대구사나이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멀찌감치 떨어진 관중석에서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초로의 신사들이 있었다. 눈가에는 살짝 이슬이 맺혔다. 아버지란 언제나 그런 존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식에게 소리 없는 박수를 보내는…. 어찌 보면, 그들은 가을잔치의 숨은 조력자였다. 삼성과 두산의 플레이오프 2차전이 열리던 8일, ‘국민타자’와 ‘양신’의 아버지를 만났다.


● ‘국민타자’ 아버지가 ‘양신’ 아버지 은퇴식 주선

9월18일. 양준혁의 은퇴식이 열리기 딱 하루 전이었다. 대구 모처에서 양준혁의 아버지 양철식(75 )씨와 이승엽의 아버지 이춘광(67) 씨, 그리고 박석민(25), 안지만(27·이상 삼성)의 아버지 등 10여명이 모였다.

양철식 씨를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이춘광 씨는 “(양)준혁이 아버지 은퇴식이었다”고 했다. 양준혁이 야구선수로서 30여년을 보냈다면, 양철식 씨도 야구선수의 아버지로서 같은 시간을 함께했다. 팬들이 ‘전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들은 “그 간 고생 많으셨다”는 말로 경의를 표했다. 양철식 씨의 사람 좋은 웃음 속에는, 또 한 번 깊은 주름이 묻어나왔다.

소주 한 잔이 곁들여졌다. 흥은 오를 대로 오르고…. 양철식 씨는 장구를 잡았다. 이춘광 씨는 “준혁이 아버지는 (장구) 솜씨가 타고났다”고 했다. 아들 뒷바라지에 잠시 잊고 있었던 소싯적 실력이 발휘됐다. 양준혁의 손재주와 리듬감은 아버지를 닮았던 것이었을까. 아버지에게 직접 물어봐도 그냥 미소 지을 뿐. 양철식 씨는 “(이)승엽이가 은퇴하면, 그 때는 내가 또 은퇴식 해드려야지요”라며 웃었다.

다음 날. 양준혁 은퇴경기의 시구자는 아버지였다. 양준혁이 처음으로 야구공을 만지던 시절, 함께 캐치볼 하던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최고타자의 아버지로서 부끄럽지 않은 투구. “마운드에서 던질 수도 있는데, 조금 앞에서 던지라고 하더라고요. (오)승환이 아버지가 그러대요. 승환이 마무리투수 자리 없어지는 것 아니냐고…. (하하)”


● 아들이 프로 되려면, 아버지도 프로가 돼야….

스타선수를 키워낸 아버지의 철학은 확실했다. 이춘광 씨의 지론은 “아버지 역시 프로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아들이 못했지만 팀이 이길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프로 아버지’는 팀이 승리하면, 아들의 부진에도 고개 숙이지 않는다. 반대로 아들이 잘했더라도 팀이 패했다면 마냥 기뻐해서는 안 된다.

이춘광 씨는 아들이 야구에 입문하는 것을 극구반대 했다. “운동해서 성공하는 사람 못 봤다”는 것이 이유였다. 100명이 야구를 시작하면, 프로의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선수는 1∼2 명 뿐. 아들은 학창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럴수록 아버지는 몸을 낮췄다. 진로가 걸린 문제라 학부모들은 출전과 활약 여부에 예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대 뒤로 사라져가는 아들의 친구들을 보면, 이춘광 씨도 마음이 쓰렸다. 그리고 아들에게도 ‘자만하지 말라’며 몸소 겸손의 미덕을 보였다. 그래야 자신도, 팀도 살기 때문이다.

이춘광 씨는 “아버지들끼리도 팀워크가 중요하다”고 했다. 양철식 씨와 이춘광 씨가 처음 만난 지는 벌써 20년 가까이 된다. 한 때 신동주, 임창용 등의 아버지도 대구구장에서 만나는 주요멤버였다. 누구는 커피, 누구는 간식거리. 이렇게 싸들고 아들들을 응원하며 하나가 됐다.

하지만 어느덧 그라운드에서처럼 대구구장의 한 구석에서도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양철식 씨는 “(김)상수(20·삼성) 아버지는 아마 쉰이 안 됐을 걸?”이라며 웃었다. 거의 아들뻘이다. 양준혁은 이제 덕아웃에서 힘을 보태는 상황이지만, 양철식 씨는 PO 1·2차전이 열리는 대구구장을 내내 지켰다. 이춘광 씨 역시 “내가 안 가야 (관중석) 자리가 나지…”라며 TV로 시청했지만, 응원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이제 그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번 가을잔치의 주역이 될 ‘또 다른 아들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대구|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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