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가 창단 3년 만에 전격 해체됐다.
고양 원더스는 11일 구단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팀을 해체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2011년 9월 15일 창단한 고양 원더스는 ‘열정에게 기회를’이란 슬로건 아래 야구 선수의 꿈을 포기해야 했던 선수들에게 재도전의 무대를 마련해 준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그 결과 고양 원더스는 2012년 이희성(LG)을 시작으로 총 22명의 선수가 프로 구단에 입단하는 기적을 일궈냈다. 평생 야구를 해왔지만 프로의 높은 장벽에 가로막힌 선수들에게 원더스는 팀 이름 그대로 기적의 발판이었다.
원더스는 2012년 20승 7무 21패(승률 0.488), 2013년 27승 6무 15패(승률 0.643) 이번 시즌에는 43승 12무 25패(승률 0.632)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구단 측은 “이런 의미와 작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구단을 3년간 운영하며 창단을 제의했던 KBO와 구단 운영에 대한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반복해 확인했다. 아쉽지만 한국 최초의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는 2014년 시즌을 끝으로 여기서 도전을 멈추고자 한다”며 스스로 신화의 마감을 선언하고 말았다.
해체 선언 후 많은 야구팬들과 관계자들이 아쉬움을 삼켰지만 누구보다 가슴 아팠을 사람들은 바로 원더스 유니폼을 입고 있던 선수들이었을 것이다. 고양 원더스에서 꿈을 키우던 한 선수를 통해 고양 원더스 해체 심경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 청천벽력 같았던 해체 소식
투수 이한별(25)은 고양 원더스 창단을 함께한 멤버다. 현재 공익근무로 병역의무를 수행 중인 그는 절친한 동료였던 이희성(LG)에게 원더스 해체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해체 소식을 들은 순간 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는 “해체 발표 날 (이)희성이 형에게 원더스 해체 소식을 들었다. 머릿 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소집해제 후 다시 원더스로 돌아가 야구를 계속할 생각으로 지금도 운동 중인데 앞으로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이번 추석 때 김성근 감독님께 연락을 드렸을 때도 전혀 해체에 대한 낌새는 없었다. 해체 발표 이후 아버지는 애써 담담한 태도를 보이셨고, 어머니는 내가 말씀드릴 때까지도 모르고 계셨다. 동생도 많은 걱정을 해줬고 주변 지인들의 연락도 정말 많이 받았다”며 안타까워했다.
평탄치 않았던 그의 야구 인생에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온 순간이었다.
- 야구선수 이한별
부천 신도 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한 이한별은 “친구들과 축구를 하며 놀고 있었는데 야구부 훈련 도중 공이 굴러와 다시 던져줬다. 그 모습을 본 감독님이 야구를 해보라고 권유하셨다. 부모님은 반대하셨는데 유니폼도 멋있고 야구를 하고 싶어서 부모님을 설득했다. 6 학년 때 부모님이 반대하셨는데 1주일동안 단식 투쟁을 하며 결국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성곡 중학교를 거쳐 부천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2학년 때 내야수에서 투수로 변신했고 3학년이 되면서 안산공고로 전학을 선택했다. 당시 안산공고에는 김광현(SK)이 속해 있었다.
이한별은 김광현을 처음 만났을 당시에 대해 “(김)광현이 형은 내가 전학 갔을 때 이미 SK에 1차 지명을 받은 상태였다. 말도 걸기 힘든 선배였다. 당시 내가 러닝 훈련을 잘 소화하지 못하자 코치님이 광현이 형을 불러 같이 뛰어주라고 하셨다. 광현이 형은 기억 못할 수도 있지만 정말 고마웠다”고 말했다.
이어 “고양 원더스에 입단한 뒤에는 스파이크와 운동복을 챙겨줬다. 김성근 감독님께 인사드리러 왔을 때 ‘감독님이 네가 내 고등학교 후배인 거 알더라.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렸으니 열심히 해’라며 격려도 해줬다”며 김광현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안산공고를 졸업한 이한별은 중앙대에 진학했다. 대학 동기 중에는 조윤준(LG), 박찬도(삼성) 등이 프로에서 뛰고 있다. 이한별은 대학 4년 통산 평균자책점 1.98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활약했다. 하지만 프로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이한별은 “4학년 때 성적이 좋았는데 구속이 빠르지 않다는 이유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 조금 억울한 마음도 들더라. 이후 프로 테스트를 알아봤지만 이미 마감된 상태였고 경찰청 시험을 봤다. 경찰청 관계자들도 ‘이렇게 좋은 성적인데 왜 프로에 못 갔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청 테스트도 낙방했다”며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어디에서도 부름을 받지 못한 이한별에게 고양 원더스라는 기회가 찾아온 것은 그 때였다. 이한별은 “경찰청 테스트에서 떨어진 뒤 고양 원더스가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테스트를 받는데 포수가 미트를 대는 대로 공이 들어가더라. 재미로 보겠다고 하고 참가했지만 그만큼 절실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 운명처럼 만난 원더스, 스승 김성근-이상훈
단번에 고양 원더스 테스트에 합격한 이한별은 김성근 감독의 지도 아래 다시 프로 구단 입단을 목표로 땀을 쏟았다. 이한별은 원더스 창단 첫 해 외국인 선수를 제외한 국내 투수 가운데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창단 초기 김성근 감독은 “고양 원더스에서 프로에 갈 투수가 있다면 이희성(LG)과 이한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한별은 ‘야신’의 애제자였다. 이한별은 “선배들이 감독님 양아들이라며 김한별로 이름을 바꾸라고 놀릴 정도로 감독님이 많이 신경을 써주셨다”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김성근 감독의 애정 어린 지도와 ‘야생마’ 이상훈 투수 코치의 지도까지 더해지며 그는 성장해 나갔다. 이미 프로에서 최고의 위치를 경험한 스승들에 대해 그는 “그 분들께 지도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감독님은 기술적으로, 이상훈 코치님은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일화도 들려줬다. 그는 “대학 선배인 김명성(롯데) 선배가 밸런스를 잡기 위해 밤새 섀도우(shadow) 피칭을 했었다는 경험담을 듣고 새벽에 실내 연습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감독님이 배트를 들고 오셔서 훈련을 도와주셔서 놀랐다. 제구는 잘 되니까 구속을 더 올려보라고 격려해주셨다. 쉬는 날에도 전화하셔서 1대1로 던지는 모습을 봐주시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또 “가끔 감독님 방을 들여다보면 감독님 혼자 개인 운동을 하시고 계셨다. 왜 개인 운동을 하시냐고 했더니 ‘야구는 10~20cm 차이로 결정된다. 너희에게 딱 그 정도 거리로 날아가는 펑고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는 내 몸이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며 존경심을 표했다.
‘야생마’ 이상훈 코치에게도 큰 가르침을 받았다. 이한별은 “감독님께 기술적인 면을 배웠다면 이상훈 코치님께는 정신적인 면을 배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마운드에서 타자와도 기 싸움을 해야 하지만 동시에 다음 타석에 들어올 타자와도 기 싸움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원더스에서 자신의 첫 승을 거둔 LG 2군과의 경기다. 이한별은 2012년 5월 4일 구리구장에서 열린 LG 2군과의 경기에서 6 1/3이닝동안 6피안타 1실점 호투를 펼치며 승리투수가 됐다.
그는 “첫 승 한 날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LG 전에 강했다. 김용의, 문선재, 최승준 등 지금 1군에서 뛰는 선수들과도 자주 상대했다. 가장 무서웠던 선수는 최준석(롯데) 선배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를 힘으로 밀어서 라인 안쪽으로 넣는 것을 보면서 무서웠다. 프로 1군에서 이 선수들을 다시 상대해 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 허민 구단주
고양 원더스의 창단은 허민 구단주의 힘이 컸다. 소문난 야구광인 그는 사비를 털어 원더스를 창단했고 많은 선수들에게 다시 꿈을 꾸도록 도왔다.
팀 창단부터 가까이서 허민 구단주를 지켜봤던 이한별은 “처음부터 선수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많이 챙겨주셨다. 고마웠다. 좋은 얘기도 많이 해주셨다. ‘나도 힘든 시절이 있었는데 노력해서 지금까지 왔다. 자신감을 잃지 말고 노력하면 길은 항상 있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그를 떠올렸다.
미국 무대에 도전한 도전 정신에도 박수를 보냈다. 이한별은 “사무실에 운동 기구를 놓고 개인 운동도 하셨다더라. 선수들을 상대로 실전 투구도 많이 하셨는데 처음엔 그냥 그렇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너클볼이 점점 좋아졌다. 나중에는 선수들도 못 치겠다고 말했다. 타석에서 직접 공을 본 이원재(NC)는 너클볼을 던지다가 직구를 하나 던졌는데 150km/h 같이 느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며 놀라워했다.
또 “야구에 대한 열정도 많으셨고 운동장에서 항상 밝으셔서 같이 웃게 돼 좋았다. 결과적으로 팀 해체 결정을 내린 것도 허민 구단주님이지만 원망이나 불만은 전혀 없다”며 허민 구단주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
코칭스태프와 허민 구단주 외에도 동료들 모두 이한별에게는 배움의 장 그 자체였다.
선수로서는 황혼의 나이에 도전을 위해 원더스를 찾은 최향남, 김수경에 대해 그는 “최향남, 김수경 선배가 다시 야구를 배우러 오시는 걸 보면서 대단하다 느꼈다. (이)희성이 형과 함께 김수경 선배를 어려서부터 우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같이 뛰어 봤으면 했는데 공익 근무를 위해 팀에서 나왔을 때 입단하셔서 그러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절친한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이희성(LG)이 원더스 출신 첫 프로 선수가 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경을 느낀 순간도 있었다.
그는 “맨 처음 (이)희성이 형이 프로에 갈 때는 싱숭생숭한 마음이었다. 물론 기뻤지만 기회도 비슷하게 받았는데 형만 프로에 간다는 것에 경쟁심도 느꼈다”고 솔직한 심경을 털어놨다.
병역의무가 겹치면서 그는 잠시 야구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 그는 “군대에 갈 때 몸이 안 좋아서 야구를 그만 두려 했는데 감독님이 군 생활 다하고 와서 다시 해보자고 하셔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며 다시 한 번 김성근 감독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에게 가장 자극과 격려를 안겨 주는 친구는 손동욱(KIA)이다. 최고 135~140km/h의 빠르지 않은 구속 탓에 프로 진출에 고배를 마셨던 이한별은 어려서부터 같이 야구를 해온 친구 손동욱을 보며 노력해서 안 될 일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한별은 “(손)동욱이는 요즘도 연락해서 계속 운동하라고 격려해준다. 동욱이는 대학교 1~2학년 때까지 최고 구속이 120km/h 정도였다. 그런데 운동을 정말 열심히 하더니 3학년 때부터 볼 때마다 점점 구속이 오르더라. 그러더니 어느 날 150km/h를 던지는 것을 보고 자극도 받았다. 최근에 동욱이가 ‘노력해서 안 되는 것 없더라’라고 말해줬다. 고맙게 생각한다”며 동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대학 선배 유희관(두산) 역시 그에게는 좋은 롤 모델이다. 유희관은 빠르지 않은 구속으로도 지난해 1군에서 10승을 거두며 정상급 투수로 성장했다. 이한별은 “(유)희관이 형이 4학년 때 난 1학년이었다. 실밥이 없는 테니스 공으로 던져도 싱커가 엄청나게 휘면서 들어가더라. 구속이 빠르지 않은데도 잘 던지는 모습을 보며 대단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 “내 야구 인생은 아직 5회말”
이처럼 야구에 인생을 바쳐온 이한별에게 고양 원더스의 해체는 큰 아픔이었다. 하지만 이한별은 좌절보다는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했다.
이한별은 “원더스는 해체됐지만 난 야구를 계속할 것이다. 전역 후 프로 구단 입단 테스트를 받기 위해 지금도 꾸준히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야구는 내 인생의 커다란 한 축이다. 놓고 싶지 않다”며 야구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어 “야구를 하다가 그만 둔 수많은 동료들이 나중에는 하나 같이 그만둔 것을 후회한다고 하더라.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고 안 된다면 할 수 없지만 끝까지 해보지도 않고 포기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미련이 더 이상 안 남을 때까지 계속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마지막으로 그는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9회말 2사 만루 동점의 풀카운트 상황에 놓여 있다. 심리적으로 많이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젊다. 아직 내 야구인생은 5회말이다. 아직 기회는 남아 있고 역전도 충분히 가능하다. 꼭 부모님을 다시 웃게 해드리고 싶다”며 눈을 반짝였다.
창단부터 해체까지의 모든 행보가 도전이었던 고양 원더스. ‘열정에게 기회를’이라는 원더스의 슬로건은 해체와 함께 막을 내렸지만 원더스에서 열정을 불태우던 선수들의 열정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다.
동아닷컴 송치훈 기자 sch5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고양 원더스는 11일 구단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팀을 해체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2011년 9월 15일 창단한 고양 원더스는 ‘열정에게 기회를’이란 슬로건 아래 야구 선수의 꿈을 포기해야 했던 선수들에게 재도전의 무대를 마련해 준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그 결과 고양 원더스는 2012년 이희성(LG)을 시작으로 총 22명의 선수가 프로 구단에 입단하는 기적을 일궈냈다. 평생 야구를 해왔지만 프로의 높은 장벽에 가로막힌 선수들에게 원더스는 팀 이름 그대로 기적의 발판이었다.
원더스는 2012년 20승 7무 21패(승률 0.488), 2013년 27승 6무 15패(승률 0.643) 이번 시즌에는 43승 12무 25패(승률 0.632)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구단 측은 “이런 의미와 작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구단을 3년간 운영하며 창단을 제의했던 KBO와 구단 운영에 대한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반복해 확인했다. 아쉽지만 한국 최초의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는 2014년 시즌을 끝으로 여기서 도전을 멈추고자 한다”며 스스로 신화의 마감을 선언하고 말았다.
해체 선언 후 많은 야구팬들과 관계자들이 아쉬움을 삼켰지만 누구보다 가슴 아팠을 사람들은 바로 원더스 유니폼을 입고 있던 선수들이었을 것이다. 고양 원더스에서 꿈을 키우던 한 선수를 통해 고양 원더스 해체 심경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 청천벽력 같았던 해체 소식
투수 이한별(25)은 고양 원더스 창단을 함께한 멤버다. 현재 공익근무로 병역의무를 수행 중인 그는 절친한 동료였던 이희성(LG)에게 원더스 해체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해체 소식을 들은 순간 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는 “해체 발표 날 (이)희성이 형에게 원더스 해체 소식을 들었다. 머릿 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소집해제 후 다시 원더스로 돌아가 야구를 계속할 생각으로 지금도 운동 중인데 앞으로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이번 추석 때 김성근 감독님께 연락을 드렸을 때도 전혀 해체에 대한 낌새는 없었다. 해체 발표 이후 아버지는 애써 담담한 태도를 보이셨고, 어머니는 내가 말씀드릴 때까지도 모르고 계셨다. 동생도 많은 걱정을 해줬고 주변 지인들의 연락도 정말 많이 받았다”며 안타까워했다.
평탄치 않았던 그의 야구 인생에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온 순간이었다.
사진=동아닷컴 송치훈 기자 sch53@donga.com
- 야구선수 이한별
부천 신도 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한 이한별은 “친구들과 축구를 하며 놀고 있었는데 야구부 훈련 도중 공이 굴러와 다시 던져줬다. 그 모습을 본 감독님이 야구를 해보라고 권유하셨다. 부모님은 반대하셨는데 유니폼도 멋있고 야구를 하고 싶어서 부모님을 설득했다. 6 학년 때 부모님이 반대하셨는데 1주일동안 단식 투쟁을 하며 결국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성곡 중학교를 거쳐 부천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2학년 때 내야수에서 투수로 변신했고 3학년이 되면서 안산공고로 전학을 선택했다. 당시 안산공고에는 김광현(SK)이 속해 있었다.
이한별은 김광현을 처음 만났을 당시에 대해 “(김)광현이 형은 내가 전학 갔을 때 이미 SK에 1차 지명을 받은 상태였다. 말도 걸기 힘든 선배였다. 당시 내가 러닝 훈련을 잘 소화하지 못하자 코치님이 광현이 형을 불러 같이 뛰어주라고 하셨다. 광현이 형은 기억 못할 수도 있지만 정말 고마웠다”고 말했다.
이어 “고양 원더스에 입단한 뒤에는 스파이크와 운동복을 챙겨줬다. 김성근 감독님께 인사드리러 왔을 때 ‘감독님이 네가 내 고등학교 후배인 거 알더라.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렸으니 열심히 해’라며 격려도 해줬다”며 김광현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안산공고를 졸업한 이한별은 중앙대에 진학했다. 대학 동기 중에는 조윤준(LG), 박찬도(삼성) 등이 프로에서 뛰고 있다. 이한별은 대학 4년 통산 평균자책점 1.98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활약했다. 하지만 프로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이한별의 대학 시절 성적.
이한별은 “4학년 때 성적이 좋았는데 구속이 빠르지 않다는 이유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 조금 억울한 마음도 들더라. 이후 프로 테스트를 알아봤지만 이미 마감된 상태였고 경찰청 시험을 봤다. 경찰청 관계자들도 ‘이렇게 좋은 성적인데 왜 프로에 못 갔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청 테스트도 낙방했다”며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어디에서도 부름을 받지 못한 이한별에게 고양 원더스라는 기회가 찾아온 것은 그 때였다. 이한별은 “경찰청 테스트에서 떨어진 뒤 고양 원더스가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테스트를 받는데 포수가 미트를 대는 대로 공이 들어가더라. 재미로 보겠다고 하고 참가했지만 그만큼 절실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 운명처럼 만난 원더스, 스승 김성근-이상훈
단번에 고양 원더스 테스트에 합격한 이한별은 김성근 감독의 지도 아래 다시 프로 구단 입단을 목표로 땀을 쏟았다. 이한별은 원더스 창단 첫 해 외국인 선수를 제외한 국내 투수 가운데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창단 초기 김성근 감독은 “고양 원더스에서 프로에 갈 투수가 있다면 이희성(LG)과 이한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한별은 ‘야신’의 애제자였다. 이한별은 “선배들이 감독님 양아들이라며 김한별로 이름을 바꾸라고 놀릴 정도로 감독님이 많이 신경을 써주셨다”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김성근 감독의 애정 어린 지도와 ‘야생마’ 이상훈 투수 코치의 지도까지 더해지며 그는 성장해 나갔다. 이미 프로에서 최고의 위치를 경험한 스승들에 대해 그는 “그 분들께 지도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감독님은 기술적으로, 이상훈 코치님은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일화도 들려줬다. 그는 “대학 선배인 김명성(롯데) 선배가 밸런스를 잡기 위해 밤새 섀도우(shadow) 피칭을 했었다는 경험담을 듣고 새벽에 실내 연습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감독님이 배트를 들고 오셔서 훈련을 도와주셔서 놀랐다. 제구는 잘 되니까 구속을 더 올려보라고 격려해주셨다. 쉬는 날에도 전화하셔서 1대1로 던지는 모습을 봐주시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또 “가끔 감독님 방을 들여다보면 감독님 혼자 개인 운동을 하시고 계셨다. 왜 개인 운동을 하시냐고 했더니 ‘야구는 10~20cm 차이로 결정된다. 너희에게 딱 그 정도 거리로 날아가는 펑고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는 내 몸이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며 존경심을 표했다.
‘야생마’ 이상훈 코치에게도 큰 가르침을 받았다. 이한별은 “감독님께 기술적인 면을 배웠다면 이상훈 코치님께는 정신적인 면을 배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마운드에서 타자와도 기 싸움을 해야 하지만 동시에 다음 타석에 들어올 타자와도 기 싸움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원더스에서 자신의 첫 승을 거둔 LG 2군과의 경기다. 이한별은 2012년 5월 4일 구리구장에서 열린 LG 2군과의 경기에서 6 1/3이닝동안 6피안타 1실점 호투를 펼치며 승리투수가 됐다.
그는 “첫 승 한 날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LG 전에 강했다. 김용의, 문선재, 최승준 등 지금 1군에서 뛰는 선수들과도 자주 상대했다. 가장 무서웠던 선수는 최준석(롯데) 선배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를 힘으로 밀어서 라인 안쪽으로 넣는 것을 보면서 무서웠다. 프로 1군에서 이 선수들을 다시 상대해 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 허민 구단주
고양 원더스의 창단은 허민 구단주의 힘이 컸다. 소문난 야구광인 그는 사비를 털어 원더스를 창단했고 많은 선수들에게 다시 꿈을 꾸도록 도왔다.
팀 창단부터 가까이서 허민 구단주를 지켜봤던 이한별은 “처음부터 선수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많이 챙겨주셨다. 고마웠다. 좋은 얘기도 많이 해주셨다. ‘나도 힘든 시절이 있었는데 노력해서 지금까지 왔다. 자신감을 잃지 말고 노력하면 길은 항상 있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그를 떠올렸다.
미국 무대에 도전한 도전 정신에도 박수를 보냈다. 이한별은 “사무실에 운동 기구를 놓고 개인 운동도 하셨다더라. 선수들을 상대로 실전 투구도 많이 하셨는데 처음엔 그냥 그렇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너클볼이 점점 좋아졌다. 나중에는 선수들도 못 치겠다고 말했다. 타석에서 직접 공을 본 이원재(NC)는 너클볼을 던지다가 직구를 하나 던졌는데 150km/h 같이 느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며 놀라워했다.
또 “야구에 대한 열정도 많으셨고 운동장에서 항상 밝으셔서 같이 웃게 돼 좋았다. 결과적으로 팀 해체 결정을 내린 것도 허민 구단주님이지만 원망이나 불만은 전혀 없다”며 허민 구단주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
코칭스태프와 허민 구단주 외에도 동료들 모두 이한별에게는 배움의 장 그 자체였다.
선수로서는 황혼의 나이에 도전을 위해 원더스를 찾은 최향남, 김수경에 대해 그는 “최향남, 김수경 선배가 다시 야구를 배우러 오시는 걸 보면서 대단하다 느꼈다. (이)희성이 형과 함께 김수경 선배를 어려서부터 우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같이 뛰어 봤으면 했는데 공익 근무를 위해 팀에서 나왔을 때 입단하셔서 그러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절친한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이희성(LG)이 원더스 출신 첫 프로 선수가 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경을 느낀 순간도 있었다.
그는 “맨 처음 (이)희성이 형이 프로에 갈 때는 싱숭생숭한 마음이었다. 물론 기뻤지만 기회도 비슷하게 받았는데 형만 프로에 간다는 것에 경쟁심도 느꼈다”고 솔직한 심경을 털어놨다.
병역의무가 겹치면서 그는 잠시 야구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 그는 “군대에 갈 때 몸이 안 좋아서 야구를 그만 두려 했는데 감독님이 군 생활 다하고 와서 다시 해보자고 하셔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며 다시 한 번 김성근 감독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에게 가장 자극과 격려를 안겨 주는 친구는 손동욱(KIA)이다. 최고 135~140km/h의 빠르지 않은 구속 탓에 프로 진출에 고배를 마셨던 이한별은 어려서부터 같이 야구를 해온 친구 손동욱을 보며 노력해서 안 될 일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한별은 “(손)동욱이는 요즘도 연락해서 계속 운동하라고 격려해준다. 동욱이는 대학교 1~2학년 때까지 최고 구속이 120km/h 정도였다. 그런데 운동을 정말 열심히 하더니 3학년 때부터 볼 때마다 점점 구속이 오르더라. 그러더니 어느 날 150km/h를 던지는 것을 보고 자극도 받았다. 최근에 동욱이가 ‘노력해서 안 되는 것 없더라’라고 말해줬다. 고맙게 생각한다”며 동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대학 선배 유희관(두산) 역시 그에게는 좋은 롤 모델이다. 유희관은 빠르지 않은 구속으로도 지난해 1군에서 10승을 거두며 정상급 투수로 성장했다. 이한별은 “(유)희관이 형이 4학년 때 난 1학년이었다. 실밥이 없는 테니스 공으로 던져도 싱커가 엄청나게 휘면서 들어가더라. 구속이 빠르지 않은데도 잘 던지는 모습을 보며 대단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 “내 야구 인생은 아직 5회말”
이처럼 야구에 인생을 바쳐온 이한별에게 고양 원더스의 해체는 큰 아픔이었다. 하지만 이한별은 좌절보다는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했다.
이한별은 “원더스는 해체됐지만 난 야구를 계속할 것이다. 전역 후 프로 구단 입단 테스트를 받기 위해 지금도 꾸준히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야구는 내 인생의 커다란 한 축이다. 놓고 싶지 않다”며 야구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어 “야구를 하다가 그만 둔 수많은 동료들이 나중에는 하나 같이 그만둔 것을 후회한다고 하더라.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고 안 된다면 할 수 없지만 끝까지 해보지도 않고 포기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미련이 더 이상 안 남을 때까지 계속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마지막으로 그는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9회말 2사 만루 동점의 풀카운트 상황에 놓여 있다. 심리적으로 많이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젊다. 아직 내 야구인생은 5회말이다. 아직 기회는 남아 있고 역전도 충분히 가능하다. 꼭 부모님을 다시 웃게 해드리고 싶다”며 눈을 반짝였다.
창단부터 해체까지의 모든 행보가 도전이었던 고양 원더스. ‘열정에게 기회를’이라는 원더스의 슬로건은 해체와 함께 막을 내렸지만 원더스에서 열정을 불태우던 선수들의 열정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다.
동아닷컴 송치훈 기자 sch5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