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에 도착한 지 보름이 지났다. 이곳 루스텐버그에서 생활한 지는 열흘 째. 식사할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폭식을 하게 됐고 아랫배가 조금 더 나왔다. 그 밖에 신체적으로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곳은 대표팀이 올해 초 고지대 적응 차원에서 전지훈련을 했던 바로 그 곳 아닌가.
루스텐버그는 해발 1500미터의 고원에 위치해 있으며 한겨울에도 평균 기온이 섭씨 16도 안팎으로 포근한 날씨를 보인다고, 미디어 안내 책자에는 설명되어 있다. 실제 지난주까지는 그랬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건 화요일부터였다. 아침부터 강풍이 불기 시작하더니, 뉴질랜드와 슬로바키아의 경기가 열린 한낮에도 기온이 영상 6도를 넘지 않았다. 나이가 지긋한 대회조직위원회 관계자들도 이런 추위는 난생 처음이라고 했다. 고도와 온도 말고도 여기엔 뭔가 다른 게 하나 더 있다. 이곳 북서부 지방의 ‘바포켕 왕국’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플래티넘 광산이 두 개나 있는데 여기서 전 세계 생산량의 70%%를 담당한다고 한다. 문제는 구리 원석에서 플래티넘을 분리, 정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기 오염이다.
11일 미국대표팀의 기자회견 도중 밥 브래들리 감독은 한 영국 기자로부터 오염된 공기 때문에 적응하기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이미 작년 컨페더레이션스컵을 통해 루스텐버그의 공기 맛을 본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어 넘겼다. 다음 날 벌어진 잉글랜드전에서 미국이 무승부를 거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고도, 날씨, 공기가 아니라 로버트 그린 골키퍼의 단순한 실수였다. 뉴질랜드가 윈스턴 리드의 막판 동점골로 슬로바키아의 발목을 잡았던 건 어떻게 보면 경험 덕분이다. 작년 이맘때 쯤 바로 이곳 루스텐버그에서 스페인과 남아공을 상대로 호된 신고식을 치렀기에, 혹독한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본선에서 28년 만에 첫 승점을 따낼 수 있지 않았을까.
승부를 결정짓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스포츠과학이 발달하면서 축구에도 데이터 분석이 도입됐고, 경기 도중에도 다양한 수치들이 실시간 제공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사람이다. 지난주 로열 바포켕 스타디움에서는 비상전원 교체 실수로 전광판이 꺼지는 사고가 있었지만 장내 아나운서가 10분마다 점수를 방송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아르헨티나전에서 박주영이 자책골을 넣었고 이청용은 상대 실수를 틈타 한 골을 만회했지만, 어쨌든 그 경기는 메시의 원맨쇼였다. 실수를 저지르든 실력을 발휘하든, 결국 축구는 사람이 하는 거다.
FIFA.COM 에디터
2002 월드컵 때 서울월드컵 경기장 관중안내를 맡으면서 시작된 축구와의 인연. 이후 인터넷에서 축구기사를 쓰며 축구를 종교처럼 믿고 있다.국제축구의 흐름을 꿰뚫고 싶다.